여름부터 준비한 여행이었다. J와 나의 오랜 꿈이었던 겨울 오로라 여행이 드디어 현실이 되고 있었다.
J는 여행을 사랑했다. 새로운 세상을 동경하고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그녀에게 여행은 쉼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뛰어난 심미안을 가진 그녀는 여행 중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았다. 몇 해 전부터는 그 사진을 그림으로 옮겼다. 그녀의 사진에서 돋보였던 미적 감각은 화폭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녀를 처음 본 곳은 인천 공항 탑승구 앞이었다. 회사 연수 차 동행하게 된 그녀는 비행기 탑승시간을 가까스로 맞춰 나타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크로스백을 엎다시피 하며 뭔가를 찾았다. 여권을 놓고 온 것 같다며 난감해하더니 다행히 다른 가방에서 발견하고는 해맑게 웃었다. 그날 오전까지 일을 마치고 급히 달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들숨과 날숨을 몰아쉬며 화장을 고치는 그녀의 온몸에서 긍정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J는 바쁜 일상을 살면서도 계절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여린 나뭇잎의 떨림을 감지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빛깔을 잡아내는 섬세함이 그녀에게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생각이 닮아서 우리는 잘 통했다. 해가 갈수록 함께 한 여행이 늘었다.
감성이 무뎌지기 전에 오로라를 보러 가자고 다음 여행지를 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팬데믹이 터졌다. 나라마다 빗장을 잠갔던 삼 년 여 동안 J는 줄곧 하늘을 그렸다. 전날 밤 그렸다는 그녀의 하늘이 매일 아침마다 내 폰으로 전달되었다. 하늘을 날고 싶은 그녀의 마음이 내게도 와닿았다.
그렇게 기다리던 여행이었다. 일찌감치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고, 숙소를 잡았다. 그녀는 이미 국제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았다며 신나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준비되고 우리는 떠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평온하던 가을 주말 저녁, 아버지가 병원으로 실려 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조마조마하던 아버지의 독거생활이 막을 내리는 것 같았다. 오직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자기 관리에 철저하셨던 아버지는 정신력으로 나이를 지배해 오셨다. 하지만 정신이 육체를 일으켜 세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은 아버지의 몸이 고열과 함께 앓고 있었다.
억눌러왔던 고통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자 아버지는 아픔에 어쩔 줄 몰라하셨다. 약에 의지해 잠들면 무슨 꿈을 꾸시는지 자꾸 울음을 토해내셨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 그간의 외로움을 털어놓으시는 걸까, 아니면 아버지 평생의 동반자셨던 하나님을 만나 그분 앞에서 아이가 되어 보채시는 걸까. 자식에게는 그저 괜찮다는 말로 둑을 쌓고 그 안에 가둬두었던 심신의 고단함이었다.
오래전 어머니가 투병하며 삶의 끝자락에 서 계셨을 때 일을 핑계로, 상황을 핑계로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던 그때의 내가 아버지를 보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나이 삼십을 넘겼어도 어머니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해야 했던 일은 어머니께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뿐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같은 후회를 하지 말라고 신은 내게 아버지와 보낼 시간을 조금 더 허락하셨다.
오로라 여행은 내 관심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나 혼자 계획한 여행이 아니지 않은가. J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가 얼마나 기다리던 여행이었던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다른 여행 동행자를 구할 수 있다면 기꺼이 나의 비행기 티켓을 넘겨줄 생각이었다.
J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그깟 여행 다음에 가면 되지요. 오로라는 꼭 같이 봅시다.”
J다웠다. 아버지에게 시간을 쏟고 싶은 내 마음을 ‘그깟 여행’으로 응원해 주었다. 그깟 오로라 여행은 자신과 함께 하자는 프러포즈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