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읽기1
<<기괴한 라디오>> 존 치버.문학동네
내가 좋아하는 체호프 스타일의 이야기_ 메스를 들고 인간 마음속을 해부해서 보여주는 냉혹한 의사
존 치버(John Cheever, 1912년~1982년)미국 문학
'풍속소설가'로 불리기도 하는 존 치버는 섬세하게 그려진 체호프 스타일의 이야기는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루거나 형이상학적인 확신을 찾으려는 등장인물들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인물들은 끝내 체념하고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동시대 작가인 레이먼드 카버와 술친구였으며, 양성애라는 추문이 뒤따른다. 46년에 서턴 플레이스 아파트에 5년간 살 때, 매일 정장을 차려입고 지하실로 내려가 점심 전까지 글을 썼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글은 몸이 통과한 경험들이 녹아지고, 그래야만 생생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작품에는 치버 특유의 냉소적이며 장난스럽고 불경스러운 면을 보여주고 있어서 어떤 독자든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 긴 가시가 들어있어 깊숙히 내안에 치부를 찔러 드러내는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참담한 작별>
그 해안이 빙퇴석 말단, 선사시대 세계의 가장자리라는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고 또 우리가 정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알려진 세상의 가장자리를 따라 걷고 있다는 생각도 떠올랐을 듯 싶다. 그 해안은 광대하고 감각을 추월할 만큼 깨끗하고 단순한 풍경이었다. 꼭 달의 한 부분 같았다p.47
내가 돌아온 이유는 단지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다시 그가 앞서 가도록 놓아두고 그를 뒤따라 걸었다. 그의 처진 어깨를 보면서, 그리고 그가 생각해두었을 온갖 작별의 말들을 생각하면서. 아버지가 익사했을 때 그는 교회로 가서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것은 그가 어머니에 대해 경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작별을 고한 지 불과 삼년 뒤의 일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로런스는 자기의 룸 메이트와 아주 절친한 사이가 되었지만 그 친구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이유로 봄 학기 초에 룸메이트를 바꾸고 그 친구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예일 대학교를 이 년 다닌 다음에는 그곳 분위기가 세상과 너무 동떨어졌다는 이유로 그 대학교에 작별을 고했다. 그는 다시 컬럼비아 대학교에 등록했고 거기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첫 번째 고용주가 정직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여섯 달을 못 넘기고 그 좋은 일자리에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시청에서 루스와 결혼하며 신교 감리교에 작별을 고했고, 두 사람은 터커 호의 어느 뒷골목으로 살러 가면서 중산층에 작별을 고했다. 1938년에 그는 정부 소속 법률가로 일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가면서 사 기업계 작별을 고했지만, 워싱턴에서 여덟 달 동안 근무한 뒤 루스벨트 행정부가 정에 무르다는 결론을 내리고 거기에도 작별을 고했다. 그들은 워싱턴을 떠나 시카고 교외로 옮겨 갔고, 거기에서 그의 이웃들 하나하나에게 술주정뱅이에다 촌스럽고 멍청하다는 이유를 붙여 차례차례 작별을 고했다. 시카고에 작별을 고한 다음에는 캔자스로 옮겨 갔다가 캔자스에도 다시 작별을 고하고 클리블랜드로 옮겨 갔다. 이제 그는 클리블랜드에도 작별을 고하고 다시 동부로 와서 바다에 작별을 고할 동안만큼만 헤드에 머물고 있었다. 그것은 서글프고 고집불통이고 편협한, 길을 잘못 든 용의주도한 성격 탓이어서 나는 그를 돕고 싶었다.
“거기에서 빠져 나와.”
내가 말했다.
“거기에서 빠져 나와 티프티.”
“뭐에서 빠져 나와?”
“그 침울함에서 빠져나오라고, 거기에서 빠져나와. 지금은 그저 여름날일 뿐이야. 너는 너 자신의 시간을 망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간을 망치고 있어. 우리에게는 휴가가 필요해, 티프티. 내게도 필요하고. 나한테는 휴식이 필요해. 우리 모두가 다 그래. 그런데 너는 모든 일을 긴장되고 불쾌하게 만들고 있어. 나한테는 일 년에 오직 2주뿐인 휴가야. 2주. 나는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싶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야. 우리에게는 휴식이 필요해. 너는 네 염세주의를 일종의 장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현실을 거부하고 외면하려는 태도일 뿐이야.”
“현실이 뭔데?”
그가 되받았다.
“다이애나는 어리석고 문란한 여자야. 오데트로 마찬가지고. 어머니는 알콜중독자. 만일 어머니가 자제하지 못하면, 일이 년 뒤에는 병원 신세를 지게 될 거야. 채디는 정직하지 못해. 그 형은 언제나 그랬지. 그리고 집은 바다로 떨어져 내리려 하고 있지.”
그는 나를 쳐다보고 뒤늦게 생각난 듯 한마디 덧붙였다.
“형은 바보고.”
“너는 음침한 개자식이야.” 내가 내뱉었다. “너는 음침한 개자식이라고.”
“그 뒤룩뒤룩한 얼굴이나 저리 치워.” 그러고 나서 그가 계속 걸어갔다.
p.48-50
.......
아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의 눈길이 사람들 속에서 여드름 난 뺨과 허약한 팔을 찾지 않도록 그를 설득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에게 인류의 헤아릴 수 없는 위대함, 삶의 거친 외면적 아름다움에 반응하도록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떻게 그의 손가락이 엄연한 진실, 그 앞에서는 두려움과 공포가 힘을 잃는 진실을 가리키게 할 수 있을까? 그날 아침 바다는 무지개 빛깔에 짙은 색이었다. 내 아내와 누이-헬렌과 다이애나-는 수영을 하고 있었고 나는 짙은 색 물에 떠 있는 수영모를 쓰지 않은 그들의 머리, 검고 노란 머리를 보았다. 그들이 물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나는 그들이 알몸이라는 것, 당당하고 아름답고 우아하기 그지없는 알몸이라는 것을 알았고, 알몸인 그 두 여자가 바다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p. 55
-그런 사람이 있다. 너무 시니컬해서 다른 사람의 작은 허점을 보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
<그저 그런 날>
“겨울이 백합들하고 무슨 상관이지, 닐스?” 그녀가 침착하게 물었다.
“저한테는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백합들을 옮겨라, 장미들을 옮겨라, 풀을 베라. 날이면 나마다 부인인 다른 어떤 걸 원합니다. 어째서 지요? 부인은 꽃들을 죽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는 꽃들을 기르고, 부인은 그 꽃들을 죽이고. 퓨즈가 나가도 부인은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부인은 꽃들을 죽입니다. 부인이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그것뿐이지요. 17년 동안 저는 부인을 기다렸습니다. 겨우 내.” 그가 고함을 질렀다. “부인은 저에게 편지를 쓰지요. 날씨가 따뜻하냐, 꽃들이 예쁘냐 하고. 그리고 나서는 옵니다. 그리고 여기에 앉아 술을 마시지요. 빌어먹을 당신네 족속들. 부인은 제 아내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를 죽이고 싶어 하지요. 부인이........”
“닥쳐요, 닐스.” 짐이 소리쳤다.
누군가의 하소연을 들으면 당장이라도 도와주고 싶어진다.
광대무변하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두 사람이 돌아서서 집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로에게 나뭇가지들이며 도랑들이며 시골의 다른 위험들에 대해 조심을 시키면서. 그들의 이야기 소리가 조그맣고 희미하고 어렴풋하게 밤공기를 채웠다. 짐은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간절히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손전등을 내주고 싶었지만, 그의 도움 없이도 그들은 집에까지 이르렀고 뒤이어 뒷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목소리가 끊겼다. 86
우리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다만, 그들이 안전하게 집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만이 진실한 도움이다.
<기이한 라디오>
“아니, 당신이 왜 그런 걸 들어야 하지?” 짐이 다시 물었다.
“그게 당신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든다면서 왜 그런 걸 들어야 하냐고?”
“오, 제발 그러지 말아요, 제발.”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삶이라는 게 너무도 끔찍하고 너무도 지저분하고 너무도 무서워요. 하지만 우린 그런 적 한 번도 없어요, 그렇죠, 여보? 내말은, 우리는 언제나 다정하고 점잖고 서로를 사랑해왔다는 거예요, 안 그래요? 그리고 우리에게 두 아이가 있어요, 두 예쁜 아이들이. 우리의 삶은 지저분하지 않아요, 그렇죠, 여보? 안 그래요?” 그녀가 양팔로 그의 목을 두르고 그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우린 행복해요, 그렇지 않아요, 여보? 우린 행복해요, 그렇죠?”
“물론 우리야 행복하지.” 그가 피곤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물론 우린 행복해. 저 빌어먹을 라디오는 내일 고치든가 치워버리든가 해야겠어.” 그러고는 아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불쌍한 여자 같으니라고.”
“당신은 날 사랑해요, 그렇죠?” 그녀가 다짐을 두었다. “그리고 우린 신경질적이지도 않고 돈 걱정도 안 하고 서로 속이지도 않아요, 그렇죠?”
“그래, 맞아, 안 그래.” 그가 대답했다.
아침에 수리공이 와서 라디오를 고쳤다.
......
그가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왜 나한테 옷값을 다 갚았다고 한 거지?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난 그저 당신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짐.” 그녀가 변명을 하고 나서 물을 좀 마셨다.
“당신, 내가 주는 돈을 좀 더 현명하게 관리하는 법을 배워야겠어, 아이린.” 그가 잔소리를 해댔다.
......
“알아요, 여보.” 그녀가 수긍했다.
“우린 이제부터라도 절약해야 돼.” 짐이 계속 늘어놓았다. “아이들을 생각해야 하니까. 당신한테 정말로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나는 돈 걱정을 굉장히 많이 하고 있어. 내 앞날에 대해서도 전혀 자신이 없고. 사실 누구도 그렇지가 못해. 내게 무슨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해 들여놓은 보험이 있기는 하지만 요즘 같아서는 그게 별로 오래가지 못할 거야. 나는 당신과 아이들을 편안히 살아가게 하려고 지독히도 열심히 일을 해왔어.” 그의 어조가 비통해졌다. “나는 내 모든 정력과 모든 젊음이 모피 코트니 라디오니 소파 커버니 하는 것들에 낭비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제발, 짐.” 그녀가 사정했다. “사람들이 우리 얘기를 듣겠어요.”
“누가 우리 얘기를 듣는다는 거지? 에마가 들을 리는 없고,”
“라디오가요.”
“아, 정말 질렸어!”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당신의 그 쓸데없는 걱정에 질릴 대로 질렸어. 라디오는 우리 얘기를 들을 수 없어. 아무도 들을 수 없다고. 그리고 또 듣더라도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
아이린은 한 일 분쯤 그 궤짝 같은 끔찍한 라디오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몸서리를 치며 서 있었지만 음악과 목소리들을 꺼버리기 전에 라이오가 친절하게도 자기에게 말을 해볼지도 모른다는, 스위니네 부모의 목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스위치에 손을 얹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차분하고 무덤덤했다.
“도쿄에서 이른 아침 철도 참사로,”스피커가 말했다.
“스물아홉 명이 사망했습니다. 버펄로 근처에 있는 맹아들을 돌보는 가톨릭병원에서 불이 났으나 오늘 아침 일찍 수녀들에 의해 진화되었습니다. 현재 기온은 섭씨 8.3도, 습도 89퍼센트입니다.”
-라디오는 차분하고 무덤덤하게 참사로 죽은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준다. 나의 불행과 전혀 상관없이. 그것에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자, 다같이 라디오를 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