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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밋 Feb 29. 2024

디지털 저장강박자에서 영감 기록자가 되기까지

이걸 왜 저장했지?

어딘가에 도움이 될 것 같으면 스마트폰에 ‘일단’ 저장해 두는 버릇이 있다. 저장해 놓고 다시 보지도 않았다. ‘그럴 거면 뭐 하러 저장하는 거야’ 스스로 의문이 들었지만, 고칠 생각이 없었다. 쓸모의 방향도 모르는 저장 파일 때문에 스마트폰을 새로 살 때면 용량부터 올려서 구입했다. 저장한 게 디지털 파일이라 다행이지, 만약 실물이었다면 우리 집에 온갖 것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서 누울 자리마저 내어주었을 게 분명했다.




영감노트 만들기

이런 내가 달라진 것은 독립서점에서 펼쳐 든 책에서 영감노트를 안 이후부터였다. 책에는 마케터 이승희 님의 영감 기록 방법에 대한 인터뷰가 실려있었다. 이승희 님도 스마트폰에 저장한 영감은 늘어나는데 정리를 안 해서 인스타그램에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방법도 쉬웠다. 사진이 예쁘지 않아도 되고 나만 알아볼 수 있도록 발견한 영감을 사진으로 찍거나 화면을 캡처해서 올리고 왜 저장했는지 이유를 적으면 끝이었다. 인터뷰를 보고 영감노트에 꽂혀서 당장 해야지 마음먹었다.


평소에 남과 비교하며 사는 삶은 싫다며 인스타그램 아이디 하나 없이 살던 내가 영감노트를 위해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겠다고 다짐한 것은 엄청난 결심이었다. 그만큼 나만의 영감노트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하지만 늘 마음만 앞서고 실행력은 0에 수렴하는 나란 인간은 1년이 지나서야 영감노트 계정을 만들었다.


어르신들이 키오스크 앞에 서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냥 사진 올리고 해시태그 달면 됐지’하고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는데 할수록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떴다. @태그와 #태그의 차이는 무엇이며 릴스는 뭐고 스토리는 또 뭔지 하나하나 검색하며 익혔다.


특히 인스타그램 문외한으로서 내가 쓴 글과 관련된 계정을 태그하는 문화는 정말 부담스러웠다. 내가 A라는 사람의 인터뷰 내용을 영감노트에 올리고 A를 태그 하면 A에게 알림이 가도록 하는 것이다. 인스타그램을 하는 사람들은 이걸 당연하게 하고 있었는데, 내가 쓴 글을 A가 읽을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이승희 님의 인스타그램 영감노트 계정 @ins.note


영감노트 쓰기

초반에는 디자인 관련 영감을 주로 영감노트에 올렸다. 평소에 좋아 보이면 일단 저장부터 한 탓에 이걸 왜 저장했는지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원본 사진과 함께 있던 긴 글을 그대로 복사, 붙여 넣기 했다. 이런 방법은 기록하기는 쉬웠으나 내 머릿속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영감노트를 안 하느니만 못했다.


일단 눈으로 본 내용은 다 저장해두고 싶다는 욕심을 버리고, 정말 좋았던 내용만 적어보기로 했다. 나만의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우선 긴 글을 요약만 해서 올렸다. 그러다 점점 나의 개인적인 경험도 녹여내어 영감노트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영감노트에 영감이 모일수록 내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초반에 디자인 관련 영감을 올렸지만, 날이 갈수록 디자인과 상관없는 영감이 주를 이루었다. 조금 더 세세히 들여다보니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자기 일을 대하는 태도, 완성된 결과물보다 결과물이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한 고민의 과정이 영감노트에 반복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나만의 영감노트 기록법

영감노트를 7개월 이상 꾸준히 올렸더니 나만의 영감노트 기록법이 생겼다. 우선 뉴스레터, 유튜브, 책 등 일상에서 무언가를 보다가 마음에 들거나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사진으로 저장해 둔다. 영감노트에 저장한 사진과 함께 왜 좋았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를 적는다. 여기까지는 이승희 님의 영감 기록과 차이가 없었다. 나는 추가로 내가 저장한 영감을 카테고리로 분류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한눈에 알고 싶었다.


인스타그램은 카테고리 기능이 없기 때문에 구글 시트에 그동안 올린 영감노트를 내용에 따라 카테고리별로 나누었다. 영감을 나누었더니 마케팅, 브랜딩, 기획, 마인드셋 등의 내용을 영감노트에 자주 올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해 영감 중에서도 유난히 기억에 남고 좋았던 영감은 배경색을 다르게 표시해 두고, 기록한 영감을 나의 상황에 맞춰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에 대한 내용도 적어뒀다.


처음엔 엑셀에 하나하나 기록한다는 게 너무 사무적이고, 일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면서 경직된 느낌이 들었다. 영감노트:) 에서 갑자기 영감 데이터 분석(최종).xlsx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는 찐영감을 기록하고 있다. 찐영감은 인스타그램에 올리기엔 너무 내용이 길지만 주기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은, 나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영감을 혼자 볼 수 있는 공간에 기록한 것이다. 영감노트 인스타그램에는 가볍게 기록하다 보니 더 자세히 기록하고 싶다는 갈증을 찐영감에 풀었더니 만족스러웠다.




처음엔 단순히 모아두기만 하고 휘발되는 영감이 아까워서 붙들고 싶은 마음에 영감노트를 시작했다. 이제 영감노트는 내가 요즘 무엇을 좋아하고 관심이 있으며 어떤 생각을 하면서 지내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친구 같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영감노트 기록을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이 낯설다. 그만큼 내가 영감노트에 재미를 느낀다는 뜻이겠지. 영감노트 기록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서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다. 앞으로 영감 기록 방법은 어떻게 바뀔지, 어떤 것들이 나에게 영감이 되고 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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