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난 뭘 좋아해?> 비하인드 스토리
독립출판 후기 글을 보면 인쇄소에서 겪은 좋지 않았던 경험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인쇄 사고는 기본이고 불친절한 인쇄소 직원과 싸운 이야기, 인쇄소에서 사기당한 이야기 등 나도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생생한 경험이었다. 책을 인쇄해 본 적은 없지만 패키지, 포스터, 브로슈어, 메뉴판 등 다양한 인쇄물 제작 경험이 있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으면 다시 제작해달라고 요청하면 되지 뭘.
인쇄는 독립출판 충무로 인쇄소로 검색했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A 업체에서 했다. 애초에 소량 제작하는 인디고 인쇄 업체가 많지 않아 쉽게 고를 수 있었다. 굳이 전화나 메일을 통해 견적을 요청하지 않아도 인쇄소 홈페이지에서 사양을 입력하면 견적을 바로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샘플을 받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몇 달 걸려서 혼자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기념으로 사진부터 찍고 수정할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도서관에 가서 책꽂이에 살짝 꽂아놓고 제목이 잘 보이는지도 확인했다. 수정 사항 적용 후 샘플을 한 번 더 제작한 다음 본 인쇄를 진행했다.
A 인쇄소는 제작 속도가 빨라서 1권을 제작해도 100권을 제작해도 다음 날이면 책을 받을 수 있었다. 택배 배송은 책이 파손될 수 있다는 후기를 봐서 퀵을 통해 받았다. 혹여나 책이 상하지 않도록 커터 칼로 택배 상자에 붙은 테이프를 조심조심 갈라서 택배 상자를 열었다.
드디어 책을 완성했다는 기쁨도 잠시, 샘플에서 보이지 않았던 인쇄 오류가 보였다. 문제 있는 책은 한두 권이 아니라 거의 전부 다 그랬다. 업체 퇴근 시간이어서 게시판에 사진과 함께 재제작을 문의했는데 다음 날 돌아온 답변은 "샘플과 다를 수 있다"였다. 인쇄할 때마다 결과물이 조금씩 차이 난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고 있었고, 영세한 업체에 큰 기대 없이 인쇄를 진행했지만, 무책임한 답변에 짜증이 나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누가 책 표지를 눈앞에 대고 가까이 볼 일 없을 테니, 내 눈이 예민한 거로 생각하고 일단 넘겼다. 그런데 책 내지에도 문제가 있었다. 책 표지를 신경 쓰느라 발견하지 못한 문제였다.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어서 다시 문의했다. 담당자 통해서 연락한다고 한 지 6시간이 지나도 연락이 안 와서 내가 먼저 연락했다. 이번에도 재제작 안 해준다고 할까 봐 걱정했다. 이번에는 단호하게 요청할 생각으로 미리 할 말을 적어두고 전화했다.
걱정과 다르게 문제를 말하니 담당자는 쿨하게 다시 제작해 주겠다고 했다. 담당자마다 재제작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조금씩 다른 듯했다. 다행이었다. 다시 제작한 책도 아주 빠르게 도착했다. 빨리 제작 안 해도 좋으니 인쇄 오류가 적으면 좋겠는데. 만약 2쇄를 진행한다면 다른 업체에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엔 1쇄 견적 비교할 때 A 인쇄소보다 비쌌던 B 인쇄소에서 제작 하기로 했다. B 인쇄소는 홈페이지 화면부터 정리가 잘되어있어 신뢰감이 갔다. 샘플 2개를 제작하면 한 권은 업체에서 보관하여 샘플 컬러에 맞춰 본품 컬러를 맞춰주는 데다가 샘플비용은 포인트로 돌려주는 서비스도 제공했다. 1쇄 할 때는 A 인쇄소보다 견적이 비싸서 넘겼는데, 이번에 토너 인쇄 할인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이벤트 견적으로 하니 A 인쇄소보다 훨씬 저렴했다. 컬러 표지는 인디고 인쇄로 하고, 흑백 내지는 토너로 했다는 후기가 있기에 이번엔 그렇게 진행해 보기로 했다.
1쇄 책이 재고가 다 나간 시점에 한 서점에서 책 재입고를 요청해서 제작 시간을 줄이기 위해 충무로에 직접 가서 샘플을 확인했다. 확인 후 매장에 있는 컴퓨터로 본 인쇄 발주도 바로 진행했다. 샘플을 챙겨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급하게 진행한 탓일까? 집에서 샘플을 다시 보다가 매장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를 발견했다.
'이게 뭐야?'
책 내지가 물결치듯이 휘어 있었다. 이걸 왜 매장에서 못 봤을까? 늦은 저녁이지만 그때라도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아직 책 제작대기 상태여서 고객 게시판에 본품 제작 시 동일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신경 써달라고 글을 남겼다. 다음 날 오전 게시물 답변을 보고 경악했다.
"토너 인쇄기 특성상 휘는 현상이 나타나오니, 해당 현상이 우려되는 경우 인디고 인쇄로 변경하시기를 바랍니다"
와, 기계에 그런 특성이 있으면 미리 홈페이지에 안내해야 하는 거 아닌가? 홈페이지에 "토너 인쇄 할인 이벤트"를 대문짝만하게 홍보하면서 주의 사항 한 줄 쓰여 있지 않아서 황당했다. 어휴, 아니다. 애초에 샘플을 꼼꼼히 확인하고 발주해야 했는데 급하게 한 탓이다.
책이 제작 중이어서 급하게 인쇄소에 전화를 걸어 인디고 인쇄로 변경했다. 이미 인쇄 중이라 물결치는 책 100권을 받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인디고 인쇄로 바꿀 수 있었다. 문제는 토너 인쇄에서 인디고 인쇄로 바꿨더니 견적이 2배나 올랐다. 심지어 A 인쇄소 보다 약 17만 원 비쌌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발주 후 4일 지나서 책이 퀵으로 도착했다. 하필 그날 비까지와서 책이 젖을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박스를 비닐에 꽁꽁 싸매져 있었다. 상자를 열어 하나씩 검수했다. 언뜻 봐서는 별문제 없어 보였다. 그런데 책 절반 이상이 또 저번처럼 울렁울렁 휘어있었다. 이렇게 제작할 거면 왜 인디고 인쇄로 바꾸라고 한 거지? 허탈하고 어이가 없었다.
업체에 연락하니 책이 휘는 현상은 장마로 인한 날씨 때문에 재제작 사유가 아니라며 무거운 걸 올려두면 '완화'될 거라고 했다. 내가 원하는 건 문제 완화가 아니라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가 재제작 사유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재제작 사유일까? 책이 반으로 쪼개지는 정도의 문제가 아닌 이상 재제작은 어려워 보였다. 비싼 업체에서 제작하면 문제가 생겼을 때 재제작을 쉽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고 일어나자마자 책을 살폈는데 신기하게 조금씩 내지가 펴져 있었다. 씩씩거렸던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며칠 더 지나니 문제없는 책처럼 다 펴졌다. 물결 현상이 완화만 됐으면 다시 업체에 연락하려 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책이 펴지지 않았다면 팔지도 못하고 전부 버려야 했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번엔 어쩔 수 없었지만, 다시는 장마철에 제작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혹시라도 장마철에 제작하는 분들이 있다면 참고 하시길.
독립출판 제작 과정 중에 다른 과정은 기분 좋은 스트레스였는데 인쇄할 때는 정말 불쾌한 스트레스였다. 오죽하면 다음엔 인쇄하지 말고 전자책으로만 만들어야 하나 생각했다. 그래도 책은 한장 한장 손으로 넘기는 맛인데.... 스트레스는 받았지만, 독자에게 좋은 퀄리티의 책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괜찮아졌다. 이렇게 인쇄할 때마다 스트레스받을 거면 다음엔 처음부터 많이 만들어야겠다(안 만든다고는 안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