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omn.kr/1w0d2
과학자들에게도 동료 연구자들의 연구가 어렵습니다. 과학자들에겐 연구주제가 자신의 이름인 셈이라 자신의 연구 주제로 자기를 소개하곤 하는데요. 제가 남극 빙하코어로 고기후를 연구한다고 말씀드리면 '고기후'와 '빙하코어'라는 단어 때문에 많은 분이 당황해 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말을 좀 더 풀어 "남극대륙에서 채취한 얼음을 이용해, 과거 기후를 연구하는데요…"라고 운을 띄우고 빙하 시료를 왜 쓰는지, 과거 기후 연구의 필요성에 관해 설명합니다.
이번 기사를 준비하면서, 2004년에 개봉한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를 다시 보았습니다. 영화 첫 장면을 보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첫 장면이 잭 홀 박사가 남극에서 빙하코어를 시추하는 모습이었는데, 그게 남극 빙하로 과거 기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이제부턴 누가 저에게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어보신다면, 영화 <투모로우>의 주인공이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려고요.
▲ 2018년 한국 극지연구소 빙하 코어 연구팀이 남극 (Tourmaline plateau)에 빙하 시추 기기를 설치하는 모습 ⓒ 한창희
잭 홀 박사는 남극에 다녀온 후 국제회의에서 연구내용을 발표합니다. 그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빙하가 녹아 아이러니하게도 빙하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발표합니다. 그는 왜 빙하기가 오게 되는지 설명하기 위해 뜬금없이 해양순환을 언급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전 세계 해양은 해양 표층을 흐르는 표층수와 해양 깊은 곳에서 흐르는 심층수가 서로 컨베이어 벨트처럼 연결돼 전 세계를 돌아다닙니다. 이 해양 순환은 밀도의 영향을 받는데, 밀도를 결정짓는 건 온도와 염분입니다. 온도가 낮고 염분이 높으면 밀도가 높고, 반대로 온도가 높고 염분이 낮으면 밀도가 낮은 것이죠. 그래서 밀도가 높은 물은 바다 깊숙이 천천히 순환하고, 반대로 밀도가 낮은 물은 표층에서 순환합니다.
전 지구 중 해양 순환의 핵심이 되는 지역은 북대서양 지역입니다. 밀도가 높은 심층수가 형성되는 지역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북반구 고위도 지역인 그린란드 주변의 해수는 밀도가 높습니다. 바닷물도 온도가 낮으면 어는데요. 이때 얼면서 물만 얼고 염분은 바다로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린란드 주변에 차갑고 염분이 높은 심층수가 형성됩니다.
때문에 북반구 대서양 지역을 심층수가 형성되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신기하죠? 우리가 보기엔 그냥 바다인데 바다 깊은 곳을 움직이는 해류가 형성되는 곳이 있답니다. 이 밀도 높은 심층수는 저위도로 이동하여 남극 대륙 주변을 돌고 돌다 다시 북반구로 올라갑니다.
북대서양 고위도에서 심층수가 형성돼, 고위도 해수가 바다 깊숙이 남쪽으로 이동해, 그린란드 주변에 공간이 비었습니다. 이 공간을 따뜻한 멕시코만에서 형성된 표층수인 멕시코 만류가 고위도로 이동해 메웁니다. 이러한 해양 순환을 대서양 자오선의 역전순환(Atlantic meridional overturning circulation, 약어로 AMOC)이라고 합니다.
북대서양 열대지방의 표층수가 북반구로 이동하고, 대서양에서 형성되는 심층수로 인해 차가운 물이 저위도로 이동하며, 전 지구적으로 열과 염분을 교환하는데요. 해수순환 덕분에, 적도는 너무 뜨겁지 않고, 극지는 너무 춥지 않게 만드는 거죠.
▲ 바다 위를 떠도는 유빙의 모습 ⓒ 최한진
북대서양 고위도 지역에서 빙하가 많이 녹거나, 해수의 온도가 높아지거나, 혹은 비가 많이 내려 해수의 밀도가 낮아지면 심층수 생성에 방해를 받게 됩니다. 공장에 전기 공급이 나가면 컨베이어 벨트가 멈춰 공산품 생산이 멈추듯, 해수가 전 세계를 돌며 열과 염분을 교환하던 것을 딱 멈춰 버리게 됩니다.
컨베이어 벨트가 딱 멈춰 버리니, 북대서양 고위도 지역에 따뜻한 표층수의 유입이 멈춰 북반구 고위도 지역의 온도가 하강하게 됩니다. 영화 <투모로우>의 홀 박사가 이러한 이유로 빙하기가 도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입니다.
과거 기록을 살펴보면 빙하기에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되었습니다. '빙하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춥기만 했을 것 같지만, 빙하기 기간에 추운 시기와 상대적으로 따뜻한 시기가 반복해서 나타났습니다. 18.5-13.5만 년 전에 발생한 빙하기 기간의 기후자료를 한번 살펴볼까요?
이때는 자연적으로 북대서양 고위도 지역에서 빙하의 붕괴와 강수량의 증가로 해류의 컨베이어 벨트가 멈췄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이를 영어로 AMOC shutdown이라고 표현합니다). 컨베이어 벨트가 멈추자 북반구 지역에는 따뜻한 멕시코만류의 유입이 끊어지고 차가운 심층수가 남반부로 이동하지 못하니 북반구 고위도 지역인 그린란드지역은 온도가 하강하고, 반대로 차가운 심층수가 유입이 줄어드니 남극은 상대적으로 따뜻해지기 시작했습니다.
▲ (가) 해양퇴적물로 추정한 그린란드 온도변화 (나) 남극 돔 씨에서 복원한 남극 온도 변화 (다) 이산화탄소 농도 ⓒ 신진화
다시 해류의 컨베이어 벨트가 가동되기 시작하면 그린란드에서는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고 반대로 남극에서는 온도가 천천히 하강하기 시작합니다. 그린란드와 남극의 온도가 반대로 움직이는 거죠. 그래서 이 시기의 그린란드의 기온과 남극 기온자료를 한 그림에 그려보면, 데이터 중간 사이에 꼭 거울을 놓아둔 것 같습니다.
이때 대기 중 이산화탄소는 이러한 기후에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이 기간에 이산화탄소농도는 180~210ppm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이산화탄소는 남극 빙하에서 복원한 온도처럼 농도가 상승했다 하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때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20-25ppm 정도 올라갔다 내려갑니다. 과거에도 이산화탄소가 급격히 증가한 시기가 있었다고 하면 놀라시겠지만 사실 20ppm 오르는데 약 3천 년이나 걸렸습니다. 지금과 비교하면 아주 천천히 증가했죠.
영화 <투모로우>의 원제는 'The day after tomorrow'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 다가올 수 있는 날'이라는 의미로 지었다고 합니다. 잭 홀 박사가 주장하는 대로 빙하기가 올까요? 저는 지구의 과거가 궁금한 사람인데 영화를 보고 났더니 저도 지구의 미래가 무척이나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