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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Oct 10. 2023

심청이의 파혼

파혼으로 비로소 눈을 뜬 나의 이야기

  26살 봄, 나는 교사임용시험에서 떨어졌다. 늘 노력에 비해 운이 좋았던 터라 지금껏 큰 좌절 없이 살아온 인생이었는데, 처음으로 쓴 실패를 맛보았다. 그와 동시에 나의 자존감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우울해하고 있는데, 아빠가 웬 남자를 하나 만나보라고 했다. 아빠가 주선하는 소개팅이라니 웃기기도 하고, 얼마나 좋은 사람이길래 딸에게 소개하나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오케이 했다. 여자는 서른 전에 꼭 결혼해야 한다는 고루한 생각을 가진 부모님의 시커먼 계략인 줄도 모르고, 그저 내 우울한 일상의 작은 이벤트라 여겼다.      

  

  그 남자는 아버지와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신입 공무원이었다. 경상도가 고향이었고, 나보다 7살가량 많았으며, 명문대를 졸업했고 키가 컸다. 보여준 사진상으론 호감형이었다. 하지만 소개팅 자리에는 사진과 다른 사람이 앉아있었다. 탈모가 진행되어 이마가 아주 넓었고, 키는 컸지만 눈에 총기가 없어 어딘가 허수아비 같은 인상이었다. 마치 웃자란 푸석푸석한 콩나물을 보는 느낌이랄까. 외모의 단점을 상쇄할 만큼 대화가 잘 통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지 않고 일방적으로 말을 쏟아내는 ‘투머치토커’였다. ‘티키타카’는커녕 내가 한 질문의 의미도 파악하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가벼운 아스퍼거증후군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그날 유일하게 재미있었던 것은 함께 본 영화뿐이었다.     


  사람은 한 번 봐서는 모른다. 적어도 세 번은 만나봐야 안다는 부모님의 말에 하는 수 없이 두 번을 더 만났다. 솔직히 큰 호감은 없었지만, ‘시험에 떨어진 백수 주제에 어떤 남자가 나를 만나주겠어’ 하는 쭈글쭈글한 마음과 그래도 키 크고 명문대 졸업했으니 사귀진 않더라도 어장에 물고기로 넣어놓고 싶다는 앙큼한 생각이 작용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내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어떻게든 백수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해외에 있는 한국학교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1년 계약직으로 채용된 것이다. 부모님은 처음에 출국을 반대하셨지만 이내 허락하셨다. 당시 환율이 높아 한화로 환산하면 급여가 꽤 높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가서 결혼자금이나 벌어 와라’ 하는 생각으로 허락하신 것 같다. 역시 부모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바로 다음 달인 3월에 출국이니 그 소개팅남과의 관계도 자연스레 끊어질 거라 기대했다. 딱히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용감한 해외살이를 시작하고 한 달이 지났다. 새로운 일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부모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5월 연휴 때에 한국에 잠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이유를 묻자 상견례(!) 날짜를 잡았다는 것이다. 그렇다. 2월에 딱 3번 만났던 바로 그 남자와 상견례를 한다는 것이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고, 3번 만나고 결혼이라니. 아니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지금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싫다고 안 간다고 했다. 그러자 엄마가 가스라이팅을 시전 했다. 너 지금 시험도 떨어지고 1년 계약직이다. 불안한 신분에 나이만 먹어서 벌써 스물여섯 살이다. 이러다가 금방 서른 된다. 차라리 결혼해서 다시 공부하는 게 낫다. 엄마 봐라 일찍 결혼해서 애들 다 키워놓고 좋지 않니. 아빠가 직장에서 봤는데 성실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더라. 결혼? 그거 불타오르는 감정으로 하는 거 아니다. 살다 보면 다 똑같고 남자는 거기서 거기다. 등등 지금이라면 씨알도 안 먹힐 말들로 딸을 깎아내리고 조종했다. 시험에 떨어져서 돈벌이도 못 하는 딸에게 더 이상 투자하기는 아까우니, 나이 먹어 값 떨어지기 전에 빨리 결혼시켜 버려야겠다는 의도는 꽁꽁 숨겨놓고 말이다.     


  자식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겼던 부모님은 오로지 본인들의 생각만이 옳고 늘 그게 너를 위한 것이라 주장했다. 책에서도 TV에서도 늘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위한다고 이야기하니까 한 번도 그걸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나의 감정, 생각, 취향을 모두 부정당해도 그럴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부탁을 거절하면 그 즉시 모든 애정을 거두어 가는 것으로 길들여져 온 터라 이번에도 나는 부모님에게 지고 말았다.      


  상견례도 보통 상견례가 아니었다. 직계가족만 만나 조용히 식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머리 벗겨진 말단공무원 예비 사위가 자랑스러우셨는지 아버지의 다섯 형제 내외를 모두 부르셨다. 이미 결혼식 뒤풀이 같은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나는 빌려온 고양이처럼 가만히 앉아있었다. 당시엔 정말 남의 일처럼 아무 생각이 안 들었는데, 뒤늦게 이 사건을 복기하면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부모라고 해서 늘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내 아버지가 이 정도로 경솔한 사람인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상견례를 마치고 얼마 뒤, 그 남자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내가 사는 나라에 찾아왔다. 우리가 만난 지 100일이 되었다나. 급히 오느라 환전을 하나도 못 해서 선물은 살 수 없고, 너를 만나기 위해 내가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선물이라고 했다. 33살 먹은 남자가 신용카드 한 장이 없는지 어이없게도 모든 숙식을 내가 제공해야 했다. 그 와중에 내가 김치를 가위로 써는 것을 보더니 자기 엄마는 그렇게 안 한다면서, 김치는 도마에 놓고 칼로 보기 좋게 반달 모양으로 소복이 썰어야 한다며 잔소리를 했다. 이쯤 되면 도망쳐야 정상인데, 부모에게조차 사랑받고 존중받아 본 경험이 없는 불쌍한 심청이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냥 인당수에 직진하기로 했다.     


  12월로 날을 잡았고, 여름방학을 이용해 한국에 방문하여 결혼 준비를 했다. 공항에서 그 남자를 만나 차를 타고 가는데 이른 시간에 비행기를 타서 그런지 너무 피곤했다. 그래서 좀 자고 싶으니 라디오 소리를 줄여달라 부탁했다. 그랬더니 그 남자가 소리를 줄이면 자기가 졸리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나에 대한 배려심이 조금도 없다는 게 느껴졌다.      


  사촌 동생들을 만나 소개하고 밥을 사는 자리였다. 계산할 때가 되니 이 남자가 깜빡하고 지갑을 안 가져왔단다. 나중에 갚을 테니 내게 30만 원만 빌려달라고 했다. 7살이나 많은 남자가 여자에게 빌붙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보다. 지난번에 환전을 못 했다는 게 우연이 아님이 틀림없었다. 결국 저 30만 원도 갚지 않았다. 그는 금전 관계가 매우 지저분하고 써야 할 때 쓰지 않는 인색한 사람이었다. 그의 돈에 대한 집착은 굉장히 강했다. 어느 날 내 급여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그 돈이 탐났나 보다. 너 결혼하고 다시 공부하려면 비용이 들 테니 그 돈을 가져오면 좋겠다고 대놓고 말했다. 내게 수입이 없으니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어 일견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반은 부모님을 드리고, 반은 결혼할 때 가지고 가겠다고 했다. 부모님이나 그 남자에게 줄 생각만 했지 애초에 심청이는 본인을 위해 쓴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부모에게도 미래의 남편에게도 그저 짐이라는 죄책감만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 남자가 부모님께 찾아가서 “지영이가 벌면 얼마나 번다고 그 돈을 꼭 받으셔야겠냐!” 이런 망언을 한 것이다. 이쯤 되면 부모님 쪽에서 파혼을 고려해야 할 것 같은데, 좀 씁쓸해하실 뿐 다른 말이 없으셨다.     


  식장도 잡고, 한복도 맞췄고, 드레스 피팅도 하고, 마지막으로 웨딩 촬영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나 이지영, 지금까지 말 잘 듣는 착한 딸로 살아왔지만, 이번만큼은 그래선 안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몇 번이고 조상님이 이 남자는 아니라는 시그널을 보내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간의 이상 징후를 모두 이야기하고 부모님께 나는 이 결혼 못하겠다. 알아서 정리하셔라. 확실히 못을 박고 출국했다.    


 



  며칠 뒤 퇴근하고 돌아오자 집 앞에 엄마가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진상들의 취미는 예고 없이 찾아오기인가 보다. 자칭 이성적이고, 본인 말은 다 맞다고 일관해온 엄마가 내 앞에서 어린애처럼 엉엉 울며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지영아... 흑흑... 엄마가 진짜 미안한데... 한 번만 참고 결혼해 주면 안 될까?” 이 말을 듣고 온몸의 피가 싹 식는 듯했다. 지난 26년간 엄마가 말도 안 되는 일로 화를 내고 구박을 해도 다 나를 위해서,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엄마는 딸의 인생보다 자신의 체면이 더 중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우선 엄마를 달랬다. 손님인 줄 알았던 사람이 실은 칼을 숨기고 있는 강도라는 걸 눈치챈 가게 주인처럼 행동했다. 최대한 자극하지 않고, 나의 배신감은 꼭꼭 숨겨 두었다. 다른 얘길 꺼내고, 같이 밥을 먹고 엄마를 안심시켰다.     


   다음 날, 이번에는 그 남자가 찾아왔다. 1차로 엄마가 설득을 하고, 2차로 그 남자가 회유하는 것으로 작당을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남자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이번에도 숙소 예약을 전혀 안 해 온 것이다. 그러면서 당연히 내가 사는 원룸에서 잘 생각을 했다. 아니 상식적으로 한 명이 자기에도 좁은 원룸에 예비 장모와 예비 사위까지 3명이 어떻게 잔단 말인가. 내가 엄마도 계시니 재워주기 곤란하다고 하니까 그 남자가 ‘삐쳤다’. 아무래도 본인이 여기에 온 목적을 망각한 듯했다. 결국 이번에도 내가 근처 숙소를 잡아주었다. 확실히 이런 꼴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엄마도 이 새끼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알아서 파혼 진행하겠다고 하고 한국으로 가셨다.      


  그 뒤에 이 남자와 진흙탕 같은 진상 스토리가 있으나 생략하겠다. 결국 결혼 준비했던 것들을 모두 취소하고 나에게 작은 다이아가 박힌 프러포즈 링만 남았다. 그냥 돌려줄까 했다가 그간 나한테 빌붙었던 것과 갚지 않은 돈을 생각하면 괘씸해서 그냥 팔아버렸다. 50만 원을 받았는데 내가 갈취당한 금액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조금은 통쾌했다.      


  나는 착한 딸이 아니었다. 그저 살기 위해서, 혼나고 싶지 않아서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이었다. 내 생각을 말하고 내 마음대로 행동하면 차가운 눈빛이 돌아올 뿐이니까. 행여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책임 추궁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학습된 무기력으로 나는 인륜지대사인 결혼마저도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려고 했다. 그냥 막연히 ‘어른들이 좋다면 좋은 거겠지.’ ‘잘못되어도 내 잘못은 아니니까 혼나지 않을 거야.’라는 유아적인 생각을 했던 것이다. 부모님의 실체를 깨닫고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이 일을 겪은 후로 나는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부모님을 위해 인당수에 빠지는 것보다 중요하고 즐거운 일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고통받고 있는 다른 심청이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얘야, 나를 위한 삶을 살아도 괜찮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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