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엄마는 내게 예쁘단 말을 잘하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예쁘다 귀엽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말이다. 그런 엄마가 유일하게 나에게 예쁘다고 말하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내가 외모에 관심을 가질 때였다.
“너는 안경 써도 예뻐. 외모 꾸미는 거는 머리 빈 애들이나 하는 거야.”
중고등학교 때는 학업에 힘쓰라고 엄마가 일부러 그런 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무 살이 넘어서도 엄마는 내가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엄마가 생각하는 화장은 그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고,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술집 여자들이나 하는 것이었다. 내면이 부족한 사람들이 외면 꾸미기에 집착하는 거라고 했다. 불행한 엄마를 나라도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던 나는, 엄마의 가치관에 순응했다. 그렇게 가장 눈부셔야 할 20대 초반을 안경과 츄리닝, 민낯으로 보냈다.
25살,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기숙사에서 만난 멋쟁이 언니가 나를 데리고 인형 놀이를 했다. “지영이는 다리가 예쁘니까 이 치마를 입으면 잘 어울릴 것 같아.” “쌍꺼풀이 없어서 인상이 흐릿할 때는 섀도랑 아이라인으로 강조를 해주고, 어머 너 입술 모양 되게 이쁘다!” 언니는 나도 몰랐던 내 외모의 장점을 알려주었고, 단점을 보완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언니와 함께 한껏 꾸미고 외출해서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감이 생기고 즐거웠다. 이성의 관심을 받는 것도 싫지 않았다.
늘 무채색에 무난한 싸구려 옷만 사던 나였는데, 처음으로 나에게 좋은 것, 예쁜 것을 주고 싶어졌다. 내일은 뭘 입을까? 어떻게 화장을 하고 누구를 만날까? 보통의 20대 다운 가볍고 상큼한 마음을 이제야 느껴보았다. 엄마 곁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불행한 가정의 장녀로서 늘 책임과 의무에 짓눌려 살다 보니 예쁜 옷, 좋은 화장품 하나 사는데도 죄책감이 들었다. 엄마가 갖지 못한 것은 나도 가져선 안 될 것 같았다. 불행한 엄마를 두고 나만 좋은 것을 누리면 이기적인 딸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자신이 빠진 불행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딸의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에게 어울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어른이 되어 버렸다. 엄마의 말이 무조건 옳고, 설령 틀리다 하더라도 나를 위해서 그런 거라고 애써 믿어왔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배신감이 느껴졌다. 때로 현실은 동화보다 더 잔혹하다 하지 않는가.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계모보다 예뻐서는 안 되는 백설 공주처럼 나는 엄마보다 젊고 아름다워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걸 이제야 알아차리다니.
다정한 남편과 결혼하여 친부모보다 더 따뜻한 시부모님을 만났다. 새로운 가족들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나’로 사랑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는 것이 자기 돌봄이고 자기만족임을 안다. 그리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꼭 나쁜 게 아니란 것도 알고 있다. 외모는 1차적으로 보이는 것이니 타인에게 깔끔하고 좋은 인상을 주면 좋지 않은가.
과거의 나는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내가 원하는 것을 꾹 참고 따르기만 하는 착한 딸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마흔 살이다. 더 이상 엄마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습관처럼 내 마음속에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화장이 너무 진한 거 아니니?” “그 색깔은 너한테 안 어울려.” 그럴 때면 ‘나는 엄마와 다른 사람이다.’라는 말을 주문처럼 왼다. 예쁘고 안 예쁘고는 거울에게 물을 것이 아니라 내가 정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