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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텔라 Apr 02. 2023

<슬램덩크>, 진심의 미학: “농구, 좋아하세요?”






농구, 좋아하세요?

<슬램덩크>라는 대서사시는 이 질문 하나로 시작되었다. “영화 좋아하세요?”, “음악 좋아하세요?”처럼, 대상이 무엇으로 대체되든 전혀 이상하지 않을 사소한 질문. 이 질문 하나로 타인의 믿음과 사랑을 갈구하던 양키는 가족을 찾았고, 형의 상실에 머물러 있던 소년은 자아를 확립했다. 전국제패라는 먼 길을 바라보던 리더는 바로 곁의 동료들을 발견했고, 부상으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영혼은 꿈을 되찾았다. 가족이자 자아, 동료이자 꿈. 이름만 다를 뿐 그 모든 것이 농구이기에 그들은 농구를 놓을 수 없다. 승리, 사랑, 성공, 저마다의 이유를 위했던 농구가 점차 농구를 위한 농구로 변해간다. 어느 순간 그들의 농구에는 어떤 목적도 요구도 없다. 농구를 사랑하는 마음, 그 뜨겁고 처절한 진심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슬램덩크>는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진심을 담아 “정말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하기까지의 과정이기도 하다. 


농구를 향한 진심. 이노우에 타케히코가 <슬램덩크> 내내 강조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농구를 할지 말지는 스스로의 마음에 달린 문제야”라는 채치수의 말이나 “농구는 좋아하나?”라는 노 선생의 질문처럼, 농구를 하기 위해 필요한 일순위는 그 무엇도 아닌 진심이다. 농구를 사랑하는 마음 앞에서는 타고난 재능도 뒷전이고, 신체적 불리함이나 여건의 제약마저 무용지물이다. 농구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 있다면 누구나 농구라는 세계의 주인공이 된다. 신체적 한계로 농구를 포기한 채소연도, 농구 선수 강백호를 응원하는 양호열도, 코트 뒤에서 선수들을 지켜보는 이한나도, 그리고 북산 5인방의 농구를 사랑하는 우리들도.



진심이 초라해진 시대이다. ‘갓생’이니 ‘자기 계발’이니, 모든 일에 뚜렷한 목적이나 예상되는 이득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이 시대에 그저 ‘좋아서’ 하는 일은 무의미한 취급을 받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진심’이란 게 사람을 얼마나 연약하게 만드는가. 드높은 바람벽 앞에 선 한 톨의 촛불처럼 우리를 현실 앞에 끊임없이 흔들리고 시험하게 하지 않는가. 진심을 가지는 일은 무인도에서 기약 없이 구조 요청을 외치는 것과 같아서, 좋아하는 만큼 보답받을 수 없음에 상처 입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 진심은 영원한 짝사랑의 시작이자 평생 닿을 수 없는 이데아를 좇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어쩌면 지금의 인류가 진심보다 목적과 이득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은 것을 상실한 이 시대에 더는 초라해지지 않으려는 최소한의 자기 방어일 것이다.


이런 세상에 진심이 가장 중요하다는 <슬램덩크>의 메시지는 새삼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거창한 이득이 손에 쥐어지지 않을지라도, 영영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더라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결국은 포기해야 할지라도, 주어진 시간에 진심을 다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위로를 준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만 있다면 우리 모두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 그것이 다시금 우리 안의 열정을 들끓게 하고 무언가를 온몸 바쳐 사랑하고 싶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은 수단과 목적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수단성을 탈피하려 하는, 진심을 폄하하지만 사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의 힘을 믿고 싶어 하는 시대적 모순을 대변하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좋아하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무언가가 내게도 있을까? 나중 가서 후회하지 않을 만큼 그 무언가에 진심을 다하고 있는가? 시종일관 농구 좋다는 얘기만 하면서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만들다니, <슬램덩크>는 참 신기하고 요상한 작품이다. 아니, 사실은 그래서 좋다. 덕분에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무언가를 다시금 상기할 수 있어서. 아직도 나는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인가 보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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