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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텔라 Apr 09. 2023

<애프터썬>, 어떤 기록은 기억보다 아름답다




딸의 11살 생일을 기념하여 튀르키예 여행을 떠난 부녀. 덩달아 31살 생일을 맞은 아빠는 소피와 나이 차 많이 나는 남매로 보일 만큼 젊고 활기차지만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고향에서 짝을 찾아 소피를 낳았지만 현재는 고향과 소피로부터 도망치듯 멀리 떠나 산다. 가끔씩 정신 나간 춤을 추며 크게 웃지만 그 웃음소리는 이상하게 공허하다. 


그 이유를 소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는 고작 11살 배기이고 그 나이대의 소녀가 응당 치러야 할 사춘기 의식을 치르기에 바쁘다. 그래서 소피는 그저 캠코더를 들고 아빠를 찍는다. 특유의 웃는 건지 아닌지 어정쩡한 표정과 시선이 유독 오래 머문 창밖 풍경과 낯부끄러운 춤을. 그리고 묻는다. “아빠는 11살 때의 아빠한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


20년 후, 소피는 그날의 아빠처럼 짝을 찾았고 아이를 낳았고 31살 생일을 맞았다. 그날의 캠코더 영상을 돌려보면 자신의 앳된 물음이 어제 일처럼 생생히 흘러나온다. 그걸 보며 소피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이런 질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놓친 게 뭘까?

그때 나는 왜 몰랐을까?


아빠는, 왜 죽었을까?



기록은 기억을 능가할 수 없다고들 한다. 기억이 채택한 주관적인 정보를 100% 담을 수 있는 기록 장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살갗 아래서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 손끝이 곤두서는 감각, 마주친 눈빛으로 확신한 어떤 생각들. 이를 담을 수 있는 기록 장치가 등장하지 않는 한, 기억은 기록을 대체할 수 없으며 기록은 기억의 충실한 매개체에 불과하다.


허나 만약 기록된 것이 그 시간의 전부라면 어떨까. 기록물 안에 담긴 피상만을 우리가 함께했다면. 그래서 함께 있어도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과연 기억이 기록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는가?


<애프터썬> 속 소피와 아빠의 경우가 그러하다. 20년 전의 아빠는 자신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운 짐을 졌고 소피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빠는 소피가 이해하지 못할 고통을 굳이 설명하지 않았고 소피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어서 질문을 아꼈다. 그런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한 튀르키예 하늘 아래서 같은 햇빛을 쬐는 것뿐이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서로의 고통과 질문을 애써 모른척한 채로.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아빠는 사망(정황상 여행 직후 자살)했고 소피는 지금까지도 캠코더에 담긴 기록 이상으로 아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왜 11년 전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 제대로 답해주지 못했는지, 그날 밤 어쩌다 벌거벗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었는지, 마지막 당부처럼 호신술을 가르쳐준 이유가 무엇인지,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는지. 알고 싶은 건 많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물을 기회도 답을 들을 기회도 이젠 영영 사라져 버렸다.


소피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추측뿐이다. 기억에도 기록에도 담기지 못한 그 추상적인 정보값들을 조악한 화질 속에서 애타게 가늠할 수밖에 없다. 소피는 문득 아빠가 떠오를 때마다 20년 전의 한 순간에 사로잡힐 것이고 기록보다도 못한 기억을 채찍질하며 살 것이다. 그래서 <애프터썬>은 유년기의 추억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소피의 시간은 20년 전에 멈춰 있고 그의 기억은 기록보다 초라하다.



사랑하는 상대의 이면을 당사자에게 직접 설명받을 수 없다는 것, 그저 추측할 수밖에 없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소피는 20년 간 해 왔고 앞으로도 평생 이어가야 한다. 벽을 사이에 두고 고통에 신음하는 아빠, 무능력함을 탓하며 울부짖는 아빠, 혼자 남아 씁쓸한 표정을 짓는 아빠, 끝내 바닷속으로 영영 잠식하는 아빠까지. 자신이 보지 못한 아빠를 끊임없이 재구성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의 재구성이 단지 추측에 불과하며 그날의 진실을 영영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애프터썬>은 사실에 근접할 수 있어도 완벽한 사실이 되진 못하는 추측의 총집합이다. 그 점이 우리에게도 깊은 아픔과 공감을 불러온다.


그렇다면 소피는 고통스러운 되새김질의 과정을 통해 어디에 도달하고 싶은 걸까. 답은 영화 후반부,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여 흐르는 음악 <under pressure>에 있다. 

여행 마지막 날 밤, 어린 소피와 아빠는 콘도 로비에 흘러나오는 <under pressure>에 맞춰 춤을 춘다. 동시에 상상 속에서 소피는 여전히 31살에 머물러 있는 아빠를 있는 힘껏 끌어안는다. 영화의 대부분이 소피의 추측과 가정이라는 점에서 미뤄볼 때 실제로는 <under pressure>가 흘러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소피는 여행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under pressure>를 삽입함으로써 당사자에게 닿지 못할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메시지는 아래와 같다.


우리 자신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순 없을까?
왜 사랑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순 없지?
왜 우린 사랑을, 사랑을, 사랑을, 줄 수 없을까?

Can't we give ourselves one more chance
Why can't we give love that one more chance
Why can't we give love

왜냐면 사랑은 이제 낡은 표현이니까
사랑은 우리가 
밤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을 보살피게 하고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을 바꾸게 하니까

Cause love's such an old fashioned word
and love dares you to care for
The people on the edge of the night
And love dares you to change our way of
Caring about ourselves


아빠를 영영 추측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그 추측을 멈추지 않는 것. 추측으로 기록의 빈 공간을 채우기를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점점 멀어지면서 동시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 소피가 기억의 재구성을 통해 찍고자 한 종지부는 아마 일종의, 아빠와 자기 자신에 대한 위로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떠난 사람을 추모할 때 응당 그렇듯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아빠는 소피의 상상 속에서 <under pressure>에 맞춰 춤추고 있다. 아빠가 그리워지면 소피는 몇 번이라도 캠코더 영상을 틀고 기억에 없는 아빠를 마주할 것이다. 그렇기에 소피의 기록은 기억보다 아름답다. 그 사실이 소피에게도, 우리에게도 알 수 없는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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