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개발하던 남자는 어쩌다 백수 떠돌이 방랑자가 되었나
집과 직장과 조국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한 지 2년째가 되었다.
2년 동안 아무런 책임이 없는 삶을 살았다.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지고 있는 책임이랄 게 없었고, 지금도 없다. 내가 책임감을 느끼고 있던 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존재는 10여 년 전에 내 곁을 떠났다. 정확히는 12년 인가.
12년. 너무 진부한 말이지만, 시간 참 빠르다. 손쌀같이 지나갔다. 생일에 홀로 영국에서 이렇게 글을 끄적이고 있자니 오늘따라 그녀가 더 그립다. 보고 싶다. 내 생일의 유일한 의미가 되어주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날이 되어버렸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최근의 생일 파티는 내가 유치원생일 때다. 그것도 유치원 졸업 앨범에 있던 사진을 보고 기억하는 것뿐, 내겐 진정 기억에 남는 생일이란 게 없다. 엄마가 이 말을 들었으면 무척이나 슬퍼하셨을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인 걸. 엄마가 보고 싶다.
아무튼, 기억에 남는 생일처럼, 책임도 없었다. 나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책임 말고는. 세상 도처에 산재한 위험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도 나를 지켜야만 했다. 그게 내가 짊어지고 있는 유일한 책임이라면 책임이겠다. 나도 뭐라도 하나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으니, 그 정도로 적당히 넘어가자.
영단어 중에 Free Agent라는 단어가 있다.
아무 데도 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뜻인데,
내가 요새 스스로를 묘사할 때 쓰는 단어 중 하나이다.
책임이 없는 삶을 살아본 적이 있나? 책임이 없다는 건, 해야만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 없다는 건, 자신의 모든 시간을 오롯이 자기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니체에 따르면 노예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 이건 자유다. 윌리엄 월리스(William Wallace)가 브레이브하트(Braveheart)에서 외쳤던 그런 숭고한 자유와는 다른, 혹자는 방종에 가까운 상태라고 부를 만도 하지만, 아무튼 극도로 자유로운 상태의 삶이다. 나는 이 2년 동안 그런 자유로운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무엇이든 하면서 지냈다. 단 한 가지 조건만 지키면 됐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이 누군가에는 나도 포함된다. 2년 동안 그렇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삶은 이제 내 인생의 모토가 되었다.
그게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 한 자신을 사랑하라
(Love yourself unless It harms somebody else)
이 말은 내 인생의 모토가 되었다.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노력하고 있을 뿐.
나는 그렇게 최근 2년을 자유롭게 살아냈다. 뭐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사실 혹자가 보기엔 반쯤은 정신을 놓은 뻘 짓에 돈 낭비, 시간 낭비하며 허송세월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내가 대견스럽다. 나로부터 나를 2년 동안 안전하게 지켜냈기 때문이다. 정말로 훌륭히, 잘, 지켜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보면 우울증에 걸린 작가에게 상담의가 치료의 일환으로 일탈을 권하는 장면이 있다. 2년이란 시간을 일탈이라고 하기엔 너무 긴 감이 있지만 결과적으론 내게도 알맞은 처방이었다. 그 2년이란 나 홀로 치료 과정 중에 정말 깊은 골짜기에 두어 번 정도 빠지는 바람에 정말 죽을 뻔했다는 것을 제외하곤 말이다. 오랜 시간 기분부전장애를 앓은 사람들에겐 확실히 효과가 있는 처방인 것 같다. 물론 내가 기분부전장애를 앓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2년 전 지금과 비슷한 시기에 다니고 있던 회사의 대표님에게 추천받은 강남의 모 정신과 현관 앞에 서서 한참을 서성이다 그 티 없이 깨끗한 유리문을 넘어가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증상을 보면, 시챗말로 빼박이다. 물론 내 경우에는 3가지 큰 사건이 직접적으로 나를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 속으로 확 몰아넣었기 때문에 얘기가 좀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 이야기의 시작은 2021년 봄에 시작된다. 나는 게임 개발자였다. 기억이 맞다면 2013년부터 한국의 N 모 게임 개발 회사에 취직하면서 커리어를 시작했고, 학생 때부터 비슷한 일을 알바처럼 수주받아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은 분야의 일을 10년 정도하고 있던 상태였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2021년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10년째가 된 해라서 여러모로 처음으로 두 자릿수가 되는 10이라는 숫자가 다소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해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다짐을 한 가지 했다. 꼭 성공해서 이 우주의 어딘가에서 혹시라도 아들을 지켜보고 계실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겠다고. 당시에 나의 형은 꽤 괜찮은 직장에 취직이 확정된 상태였고 나는 여전히 서울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고학생이었기 때문에 내가 어머니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걱정거리인 샘이었다. 어머니의 걱정거리로 남아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정말 뭐든 열심히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사망 보험금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것만으론 부족해서 꼭 장학금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랑곳없이 남은 보험금의 1/3을 떼어갔다.
어머니는 집안의 가장으로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20여 년을 고생만 하시다가 이제 막 큰 아들이
소위 효도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렇게 떠나셨다.
마치 떠나기 전 해야만 하는 일을 위해 버티고 버티다가
끝내 일이 잘 되어가는 조짐만 보고 황급히 떠나는 사람처럼.
내 기억 속의 마지막 어머니의 모습은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 대한 미련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의 목숨값으로 공부하고 있다.'
'나는 엄마의 목숨값으로 살고 있다.'
'어쩌면 엄마는 나를 위해 그렇게 미련 없이 떠나버리신 건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이 때때로 나를 덮쳐올 때마다 너무나 힘들었다. 그리고 외로웠다.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심정을 밝힐 수가 없었다.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아버지와 잘 지내려고 노력하고는 있었지만 그 사람은 분명히 내 감정이나 생각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어떤 형태의 도움이든 기대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랬던 적도 없고(내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낳아주신 은혜가 있는 아버지란 존재에게 너무 박한 것 아니냐는 감상을 방지하기 위해 약간의 스포일러를 남기자면, 지금은 아버지와 잘 지내고 있다. 상당히 잘, 과거의 나라면 절대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과거의 아버지는 내게 분명한 '웬수'였다. 원수도 아니고 웬수! 내 인생에서 싫었던 사람을 3명 꼽으라고 하면 첫 번째는 바로 떠오르지만, 나머지 둘은 공들여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 정도다. 제일 싫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실속 없이 사고만 치고 다니는 책임감 없이 선한 친구'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당연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버지'하면 떠올리는 존재로 생각하진 않는다. 가족이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책임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가 내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 여전히 너무 박하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믿어라.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형에게도 사정은 마찬가지었다. 어린 나의 롤모델이었던, 지금은 내가 누구보다 아끼는 사람이다. 물론 형보다 잘난 아우는 못돼서 아낀다고 특별히 뭔가를 해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의 짐은 되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내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지금은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엔 아니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문제는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있었다.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을 갖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 주변에 있었어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친구들과 연인들에겐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으니까' 등등의 합리화를 했다. 정작 문제는 본인이 가지고 있으면서. 인간이 겪는 감정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문제들의 원인이 대부분 그렇듯이 말이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할 수 있는 동기, 의지, 힘을 생산시켰다. '어머니 목숨값으로 공부하는데 반드시 1등이 돼야 해, 반드시 성공해야 돼.' 하면서.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를 '어머니가 계시던 시절의 나'와 '고아인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건 나를 많은 인간관계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사회적인 성공에 매몰되어 있던 나는 점점 더 다른 사람들을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해갔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이 많은 학생이었다. 지금은 그 누구와도 연락하고 있지 않다. 그렇게 깊고 깊은 우울해(海)에 10년이란 시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빠져들어가고 있는 차에 큰일이 터진 것이다.
친구들아, 이런 못난이라 미안하다.
Mea Culpa!
어머니가 내 곁을 떠난 지 10년, 10년 동안 열심히 했지만 성적표는 원하는 만큼 좋지 못했다. 게임 업계에선 국내에서 1, 2위를 하는 회사들을 다녔고, 한 번 들어가기도 힘든 회사에서 '퇴사만 3회'라는 괴상한 이력을 남기기도 했고, 전설의 TJ와의 조찬이라는 커리어 하이(?)를 달성하는 등, 누가 봐도 내가 가진 능력보다 운이 좋은 직장 생활을 했음에도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단지 운이 좋게, 다른 이들보다 좋은 동료들을 빨리 만나서 좋은 경험들을 빨리 했을 뿐 실제 가진 것보다 뻥튀기된 능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만에 빠져 더 위로 올라가고 싶었다. 개발의 중요한 의사 결정에 참여하고 싶었고, 종국에는 내 이름을 걸고 게임을 만들고 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싶었다. 감독이 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등한시하고, 방해가 되는 것들은 멸시했다. 나보다 10살도 더 연상인 동료의 면전에서 소리를 지르고 무시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앞만 보고 달렸다. 가족이나 친척, 친구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지낸 해가 갈수록 늘어났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성적표는 내 기대대로 그렇게 쉽고 빠르게 오지 않았다. 내가 잘난 줄 알았다. 특별한 줄 알았다. 겸손한 척했지만, 사실 그건 에고를 위한 페르소나였을 뿐, 그 가면을 씀으로써 얻는 게 크기 때문에 벗지 않고 있었을 뿐, 실상은 오만하기 끝이 없는 남자였다. 그래서 항상 문제를 밖에서 찾았다. 내게는 문제가 없었다. 상황과 다른 사람들이 문제였다. 커리어 초반에는 남 탓 같은 건 모르고 오히려 남탓하려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함께 목적을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친구였는데, 몇 년 사이에 그렇게 확, 흑화가 돼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내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짧은 기간 동안 직장을 여러 번 옮겼다. 하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았다. 어딜 가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당연했다. 문제는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걸 바로 보지 못했다.
마지막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큰 욕심부리지 않고 시키는 일만 잘하리라 다짐하고 반쯤은 단념하고 들어간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문제가 따라다녔다. 그러다 주제넘은 욕심을 냈고, 결과는 좋지 못했고, 크게 실망했다. 그게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은 두 번째 트리거였다.
두 번째로 만든 게임을 미국과 유럽에 출시했지만, 서비스는 1년도 채 가지 못하고 내려졌다. 내 4년을 갈아 넣은 프로젝트였다.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내 알바가 아니었다. 10년 안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서 감독으로서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그 반절에 가까운 시간을 투자한 프로젝트가 실패한 것이다. 주니어 개발자에서 성장하는 과정으로 보면 그렇게 실패한 프로젝트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인 실패는 나를 조급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 조급증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에게 훌륭한 자양분이 되었다. 결국 그 이후로 참여했던 프로젝트를 끝까지 마무리해 본 적이 없다.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노력은 했다. 하지만 자세가 틀려먹었다. 십중팔구는 내 생각이 맞다고 자만했고 주장해 보고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들의 손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싶으면 프로젝트가 방향을 잘 못 잡았다고 속단하고 곧 회사를 때려치웠다. 업계 내 또라이 보존의 법칙에서 또라이 중 한 명은 나였기 때문에 당연히 마지막 회사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즈음 나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운이 좋게 잘해둔 투자와 늘어난 연봉으로 불어나는 자산뿐이었다. 인생의 가장 큰 목표였던 커리어가 원하는 대로 잘 풀리지 않자 나는 '그래 돈이나 벌자'의 자세로 삶을 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라고 말해왔던 가난했던 소년은 직장에서 수시로 투자 내역을 들여다보며 월급루팡하는 30대 아저씨가 되어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오래 만났던 여자친구와도 이별을 하게 돼서 정말로 그때는 '돈' 말고는 내게 위안을 주는 것이 없었다. 즐겨 읽던 책들도, 취미로 쓰던 소설들도 일절 들여다보지 않았다.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기가 어려워졌다. 점점 더 돈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게 되었다. 만나는 여자들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건 단지 가치의 교환이었다. 내가 지불하는 만큼 남이 부러워할만한 여자들을 만나고 즐길 수 있는 게임, 조금 더 세련되었을 뿐이지 본질은 성매매와 다른 것이 없었다.
인생 최대 목표였던 커리어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자 마음엔 아주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버렸다. 내겐 그 거대한 구멍을 채울 수 있는 다른 것들이 없었다. 모두 커리어를 위해 희생해 왔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그럼에도 그 구멍을 메울 다른 방법은 있었지만,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다. 그래서 물욕과 성욕에 빠진 생활을 했다. 무기력증에 빠진 내게는 그게 가장 쉽고 간편하게 이 인생을 유지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장 취약한 상태일 때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듯이 말이다. 그렇게 문란한 생활을 하던 내게 마지막 세 번째 트리거가 당겨졌다.
어느 봄 날이었다. 화창한 낮이 저물고 밤이 오면 날씨가 선선해서 밤 산책을 나서기 좋은 계절이었다. 평소였다면 10여분 정도 되는 퇴근길을 걸으며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약간의 불편함이 더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유쾌한 날씨를 조금이나마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내 마음속에만 있는 환영 같은 사람들의 작은 시선조차도 감당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내 오랜 벗인 경미한 사회 불안증은 이제 대인기피증 행세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날도 퇴근하자마자 회사 앞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집에는 온기 하나 없이 적막했다. 그리고 걱정했을 터다, 오늘은 얼마나 잘 수 있을까? 벌써부터 밤이, 잠자리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우울증이란 펍의 단골손님 불면증이 어김없이 찾아온 것이다. 이 펍에서는 술 대신 물, 눈물을 마신다.
그날도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침대 옆 선반에 놓인 디지털시계를 확인할 때마다 탄식을 질렀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해보아도 문정성시를 이루는 우울증이란 펍에 잠이 발을 들여놓을 틈은 없다. 그래서 다시 핸드폰을 쥐고 화면에 떠있는 숫자들을 들여다본다. 이 숫자들은 내 마지막 동아줄이다. 스프레드 시트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둔 내 자산의 현황을 실시간으로 나타내주는 숫자들. 나는 그렇게 잠이 찾아오지 않는 밤마다 계속해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숫자들을 바라보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언젠가 우울증을 조금씩 극복해나가고 있는 시기에
고독사와 관련된 르포를 본 적이 있다.
남일 같지가 않았다.
아마 나의 가장 어두웠던 시기에 내게 돈이 없었다면,
나의 결말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남은 돈이나 다 쓰고 조용히 사라지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여행이었으니까.
그러던 중 위험한 생각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두 배만 먹으면 내 집 장만도 꿈이 아니야'. 욕망의 구덩이에 빠진 이후부터 마음속 한 구석에서 기회만 노리며 도사리고 있는 생각이었는데 애써 외면해 왔던 차였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잠 못 이루는 밤의 지루함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날 밤에는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마침 아는 재료도 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단 몇 분만에 두 배도 먹을 수 있는 재료가. 외면해 왔다고 썼지만, 사실은 의식의 눈을 가리고 몰래 준비를 해왔던 것 같다. 그런 기회를. 불행하게도 내게는 남는 게 시간이었어서 밤의 마약과 환상에 빠지기에 너무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저질러버렸다.
사실 이 부분은 요가와 담마를 수련하고 있는 지금도 생각하면 여전히 조금 아픈 부분이라 자세히 쓰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개미지옥에 평범하게 빠지는 지의 전형을 보여주기 위해 그 과정을 남겨보겠다. 혹시라도 이걸 읽은 분이 조금이라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거나 앞으로 처할 가능성이 있다면 반면교사로서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주식 같은 것에 투자를 하고 있는데 우울증이 찾아왔다면,
당장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길 강권한다.
위험하다. 건강한 정신도 망가뜨릴 수 있는 곳이 투자의 세계다.
처음엔 가용 자산의 20%를 투자했다. 수초단위로 돈이 몇 백씩 움직였다. 처음엔 올라가는 듯하더니 그새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무서웠다. 20%지만 큰돈이었다. 그래서 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거냐며 본전에 판매를 걸어두고 오락가락하는 숫자에 대고 실수였다고 본전만 찾고 빼겠다고 애원하다 못해 거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근데 몇 분만에 다시 반등을 하기 시작하더니 금세 본전을 회복해서 매도 걸어둔 게 팔려버렸다. 제발, 제발 거리며 기도한 소원이 이루어졌는데 기쁘기는커녕 약이 올랐다. 병신, 겁쟁이, 소인배 등등의 단어들이 떠오르며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재진입하기로 결정했다. '정말... 그때 누구라도 옆에 있었으면...'이라는 회한의 말을 근 2년 동안 얼마나 수없이 되뇌었는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신은 죽었으니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다.
재진입했다. 나를 빼고 오르는 것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른바 FOMO가, 정말 강렬한 포모가 찾아온 것이다. 원래 내 것이 아닌 것을 두고 내 것을 뺏겼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소인배처럼 겁먹고 안 뺏으면 벌었을 돈을 생각하며 마음을 갈았다. 이미 수 십 퍼센트가 올라간 상태였다. 내가 다시 산 이후에도 10% 정도가 몇 분만에 올랐는데 다시 곧 급격한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실현 수익에서 0이 하나 사라지자 나는 다시 겁을 집어 먹고 '몇 백이라도 어디냐'라는 마음으로 나를 달래며 급하게 다시 팔았다. 그렇게 몇 분만에 월급을 벌었다. 이건 미친 짓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진입하지는 않았지만,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건 어느 영화보다, 어느 비디오 게임보다, 어느 섹스보다 더 흥미진진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될 대로 분비된 그날 밤 역시 잠은 이루지 못했다. 새벽 즈음에 장이 마감되고 찍힌 그 재료의 등락률은 +100%를 훌쩍 넘긴 숫자였다. 눈앞에서 내 집 장만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나는 거기서 눈이 돌아갔다.
몇 분만에 벌어들인 월급엔 별 감흥이 없었다.
그걸로 집을 살 순 없으니까.
나는 일평생 '내 집'은커녕 '우리 집'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1~2년 터울로 매번 이사를 다녀야만 하는 삶을 살았다. 내가 가진 불안과 불만의 일부분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루 밤새 집을 잃은 나는 그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장 휴가를 썼다. 핸드폰에서만 하던 거래를 좀 더 신속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컴퓨터에 HTS를 설치하고 사용 방법을 익혔고, 프리 마켓에서 팔 수 있는 다른 주식들을 정리해서 총알을 보급하고, 오늘도 그 종목이 오를 수밖에 없는 증거들을 온 인터넷을 뒤지며 만반의 준비를 하며 밤이 오길 기다렸다. 이 전투는 승리해야만 했다.
결전의 밤이 되었다. 어제 크게 상승했으니 수익실현 매물 기다렸다가 가격이 떨어지면 사자는 생각으로 접근했지만 그 종목은 그딴 건 아랑곳하지도 않고 금세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꼴에 신중하게 대응하겠다고 올라갈 때 타지 않고 한 번 내려오길 기다렸다가 진입했다. 사실 이건 전 과정을 굉장히 축약해서 말한 것인데, 수 없이 많은 '매수 걸어놨다가 하락세에 쫄아서 취소하고, 그 취소한 걸 다시 후회하고, 그 후회한 걸 다시 취소하는' 지리멸렬한 과정이 있었다. 그러다 충분히 빠르게 대응하지 못해서 덜컥 매수가 되어버려서 굉장히 기분이 안 좋았는데, 얼마 후 그 기점부터 다시 오르기 시작해서 금세 또 행복해했다.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벌겋게 퍼렇게 변하는 숫자들을 마주하며 밤을 지새웠다. 이번에는 쫄보가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기 때문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다. 다시 해는 떴고, 밤새 춤사위를 펼치던 숫자들은 흡혈귀처럼 생명력을 잃었다. 문제는 그 흡혈귀가 낭자하게 남긴 피가 파란색이었다는 거였다. 계좌에 -20%가 찍혔다.
눈앞에 차 한 대가 아른거렸다.
하지만 또 쫄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포지션을 정리하지 않고 기다렸다. '주식시장은 인내심 없는 사람의 돈을 인내심 있는 사람에게 이동시키는 도구다'라는 버핏 옹의 말을 되새겼다. 전형적인 되지도 않는 확증편향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이 대목이 너무 길어지는데, 여기까지만 써도 무지성 투자로 망하는 한 전형을 충분히 보여준 것 같아서 이 부분은 이만 줄이기로 하겠다. 누구나 이 노래의 끝이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쯤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그래도 이 대목의 결말이 궁금하신 분들의 위해 남기자면, 1년 후 인도에서 요가를 수련하고 있을 때까지도 그 계좌를 들고 있었는데 계좌에 찍힌 수익률은 -98%였다. 정말 무섭고도 우스운 건, 이 노래는 2절까지 있다는 것이다. 나도 내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건 정말 이해를 뛰어넘는, 정신이 마비된 상태에서 무언가에 홀린 듯한 시기였다. 마치 반드시 자산의 대부분을 잃어야만 하는 미지의 불가항력이 작용한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논리적인 설명을 시도해 본다면, 우울증과 불면증, 목적의 결여, 탐욕, 무엇보다도 사회적인 고립이 빚어낸 참사였다. 다시 말하지만 그때 옆에 누구라도 있었다면, 한 명만 있었다면 이 노래는 다르게 쓰였을 것이다.
인간은 정말 놀라운 능력을 가진 동물이다.
매수냐 매도냐에 따라 수초 내에 그 사람의 신념 체계까지 바꿔버릴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지를
진정으로 경험하게 되면 놀랄 것이다.
결정타였다. 꿈도 사랑도 잃고 그나마 돈 모으는 재미로 지탱하고 있는 인생이었는데, 그것마저 잃은 것이다. 그것도 제 손으로, 너무도 쉽고 빠르게. 그렇게 나는 내 인생에서 두 번째로 깊은 미궁 속에 빠졌다. 한동안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일도 할 수가 없어서 직장도 관뒀다. 회사 대표님께서 고맙게도 한동안 휴직으로 처리해 주시고 좋은 병원도 소개해주시고, 심지어 면담할 때 안아주시기까지 했는데 전혀 가망이 보이지 않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은 돈은 약간의 비상금, 그것도 연초에 받은 인센티브와 남발해 버린 연차에 상응하는 돈을 뱉어냈어야 해서 그마저도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전세금. 요새 한국에서 전세 사기로 문제가 많은 그 전세금이 나를 살렸다. 전세로 그 돈 마저 묶여있지 않았다면 나는 그 돈도 내던져버렸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숨을 쉬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회사 대표님이 안아주셨을 때는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회사를 관두고는 정말 시체처럼 살았다. 한 끼도 먹지 않은 날, 심지어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침대에 누워만 있던 날도 있었다. 수시로 손과 발로 침대를 두드리고, 내리쳤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한계적 선택을 하자고 되뇌고 또 되뇌어 봐도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몰아치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라면을 박스채로 주문했다. 참기 힘들 정도로 배가 고플 때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다. 당장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할 정도로 궁한 건 아니었지만, 이제 가격표를 보지 않고 소비하는 것은 극도의 사치였다. 지금 그때를 되돌아볼 때 가장 잘 못한 것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바로 그때까지도 아무에게도 그 상황을 알리지 않는 것이었다. 평소 눈물이 잘 나지 않아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다 운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다. 오래간만에 걸려온 형의 전화에 별일 없는 척 연기를 했다. 형이 조금 더 눈치가 빨랐다면 내가 울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 달 정도를 지냈다. 살이 빠졌다. 아니 그보다 근육이 빠졌다는 걸 느꼈다. 근 하루의 전부를 침대에 누워만 있다 보니 근육이 빠진 것이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고 위화감이 들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그때의 내 주식은 방울 토마토였다. 싸고, 간편하고, 무엇보다 침대에 누워서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일도 안 하고, 가족도 안 보고, 친구도 안 보고, 아니, 사람 자체를 기피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밖에 나가야만 하는 일이 있으면 기다렸다가 새벽 3~4시 즈음에 나가곤 했다. 진단을 받진 않았지만, 대인기피증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면서 시간을 어떻게 보냈냐. 시체 단계가 지나가면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전문가들은 그걸 퇴행이라고 부르더라. 현실이 돈이 없어 싼 것만 찾아 먹던 어린 시절처럼 되어서 그랬을까. 그래도 그때는 배고파도 꿈이 있었는데. 과거를 회상하는데 어떤 순서나 흐름을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냥 멍하니 누워있다 보면 중구난방으로 이런저런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재밌는 게 과거에 가지고 있던 버릇들이 부활했다. 정말 거짓말처럼.
집에 가면, 집에 가면. 나는 가끔 이 말을 반복적으로 되뇌는 습관이 있었다. 트리거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뭔가에 집중하지 않고 있을 때면 이 '집에 가면'이라는 말을 속으로 되뇐다. 고장 난 로봇처럼 말이다.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장소도 사람도 없는 남자 치고는 이상한 버릇이다. 그리고 혓바닥을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여서 입천장을 치는, 정말 어린애였을 때 있었던 버릇도 되살아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하다. 그리고 뇌에 안개가 끼었다고 해야 할까, 의식에 안개가 끼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뭔가 뿌옇고 몽롱하달까하는 희미한 상태로 깨어있다. 왜냐면 여전히 잠을 잘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기간에 본 영화와 드라마가 그 기간을 제외하고 내 평생 동안 본 것보다 많을 것이다. 나중엔 볼 게 없어서 007의 초화부터 최근작까지 정주행을 했을 정도였다. 다른 세계 속에 빠져있는 동안에는 내게 벌어진 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빔프로젝터를 전등과 햇빛 대신 항상 켜놓고 지냈다.
그때 본 영화와 드라마 속의 모든 인물 하나하나가 다 너무나 대단해 보였다.
아주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말이다.
'저걸 어떻게 다 하지.'
그땐 밖에 나가 물 한 병 사 오는 일조차도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 시기에 겪은 처참하고 우울한 일화들이 많은데, 주야장천 이 대목에만 머물러 있을 순 없으니 이 정도로 일단락하고 넘어가겠다. 이 글의 끝은 내가 어떻게 방랑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지가 되어야 하니 말이다.
회복의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애용했던 노트 프로그램에다가 쓰기 시작했는데 정작 잘 써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전에 적어두었던 이런저런 노트들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오래전에 소설의 재료로 쓰려고 기록해 두었던 이런저런 메모들을 보게 되었다. 그랬다. 나는 글을 쓰는 취미가 있었다. 하지만 일에 치여 오랫동안 쓰지 못했고 재료들을 쌓아만 두고 조금씩 멀어지다가 어느 순간 내게 아직 쓰고 싶은 게 있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몇 달 만에, 그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느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감정이었다. 그건 상당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보통 우리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는 느낌을, 혹은 그와 반대되는 '하고 싶지 않다'라는 느낌을 언제나 가지고 살기 때문에 그것이 특별할 게 없다. 하지만 반년이란 시간을 시체처럼 살아온 나에게 그 느낌은 너무나 색달랐다. 흑과 백만 있는 단조로운 세상에 갑자기 생동감 있는 밝은 노란색이 느닷없이 솟아 나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기록해 둔 재료들과 써둔 습작들을 밤새 읽기 시작했다. 마지막 습작, 최근의 습작을 읽고 나서 잠이 들었다. 반년만에 처음으로 맛보는 잠다운 잠이었다.
하고 싶다 혹은 하고 싶지 않다는 서로 반대지만, 본질은 같다.
욕망이다.
하지만 여느 이야기에서처럼 찰나의 전환점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여전히 마음의 상처는 깊었고, 이제는 몸 상태까지 처참했다. 반년을 제대로 움직이도 않고 먹지도 않고 히키코모리 같이 살았기 때문이다. 다리를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허리, 다리, 엉덩이,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반년만에 제대로 거울에 비춰본 나의 모습은 정말 처참한 몰골 그 자체였다. 피골이 상접하다는 말의 표본으로서 박물관에 전시되면 딱 안성맞춤일 상태였다. 불면증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고, 아직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이 '싶었다'가 정말 중요했다. 나는 그날 새벽부터 강남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새벽 3시 정도면 인적이 드물어진다. 그러면 강남대로, 역삼동, 서초동, 신사, 논현, 양재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뛰었다. 그러고 나면 지쳐 잠에 빠질 수밖에 없게. 나는 그 짓을 서울을 떠나는 날까지 했다.
나를 살린 건 결국 어머니의 유언이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어머니는 내게 3가지 유언을 했는데 그중 하나가 술을 마시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술 때문에 일으킨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이전처럼 술을 마셨다면,
그래서 투자하다 망했을 때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다면
진즉에 어떤 사고든 일어났을 것이다.
그때의 순간순간들을 환기하며 글을 적다 보니 이런저런 감회가 솟아나서 애초 생각보다 상당히 많이 떠들어댄 것 같다.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보자. 새벽의 뜀박질은 정말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심신 모든 방면으로 말이다. 불면증은 서서히 사라졌고, 몸과 호흡의 상태도 좋아졌다. 잃은 돈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 한편이 아렸지만, 잘 때나 샤워할 때 어김없이 한 번씩 입을 틀어막고 소리도 질렀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형에게 우울증에 대해 털어놓았고 심지어 아버지에게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런 얘기를 아버지에게 할 수 있다는 말은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 있다는 말과 동치였다. 사실 아버지와의 관계는 우울증을 겪기 이전보다 오히려 나아졌다. 이전에는 내가 아버지에게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마도 이 경험을 통해 관계의 소중함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여전히 아버지기보단 애물단지 친구 같은 존재지만, 장족의 발전이다.
노트에서 발견한 게 한 가지 더 있었다. 오래전에 적어뒀던 위시 리스트(Bucket List)였다. 한글로 위시 리스트라 적고 영어로는 버킷 리스트라고 적은 이유가 있다. 버킷 리스트는 단순히 하고 싶은 일을 적은 것이라기보다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을 하고야 말겠다는 의지와 함께 적는 것이다. 다짐과 비슷하다. Kick the bucket이라는 슬랭에서 유래된 표현이다. 양동이 걷어차기. 왜 양동이를 걷어차는 일이 죽기 전에 꼭 할 일과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iykyk
그래서 한국을 떠났다. 내 버킷 리스트와 함께.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해서라도 당장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세 계약을 해지하고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아서 자금을 충당했다. 팔 수 없는 것들은 동네에서 나눔을 하거나 단체에 기부했다. 그 많던 물건들이 하나씩 사라지면서 집에 공백이 늘어갈 때마다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곧, 10여 년이 넘는 나 홀로 서울 생활의 끝은 배낭 단 2개로 정리되었다.
방랑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