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에세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일 Dec 15. 2021

문득 삶이 하염없다 느껴질 때


‘실존(實存)이 본질(本質)에 앞선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그렇게 정의했다. 규정되지 않은 본질을 찾아 실존이란 숙명의 짐을 지고 탕자(蕩子)처럼 생을 유랑하는 우리는 분명 고독하고 치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실존주의자로서 그의 지론이었다. 그토록 무거운 우리의 업을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 바 있다.


‘인간은 자유라는 저주를 선고받았다. 세계에 내던져진 이상, 인간은 그가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 비관이나 염세와는 다르다. 규정되지 않은 본질이라는 자유는 엄연한 저주일지언정 표독스런 영원의 저주는 아닌 것이다. 서사시의 역경과도 같은 자유라는 저주를 짊어진 채 마침내 우리는 스스로의 본질을 무한한 것들 가운데 취사선택하고 심지어는 바꿀 수도 있음이다. 신(神)에도, 기성(旣成)에도,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채, 우리는 우리의 항구적이지 않은 본질을 찾아 끊임 없이 고뇌하고, 행동하고, 책임지면 되는 것이다.


물론 미욱하고 불완전하며 필멸하는 우리는 그 과정에서 마모되거나, 흠집나거나, 깨어지거나, 끝끝내 어떠한 본질조차 담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사르트르 역시 본질이 아닌 실존이라는 개념 안에서의 보편성과 필연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과 한계, 실패마저 죄수와 자유인의 비유를 통해 본다면 축복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세상 만물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유일하게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저주받은 존재라고 역설하는 실존주의는 그야말로 휴머니즘적인 결론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ㅡ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ㅡ

내가 사르트르 실존주의자가 된 이유이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본질을 찾아 오늘도 영성(靈理)과 물성(物理)의 황무지를 누비고 있을 이 땅의 수 많은 실존들을 응원한다. 같은 처지의 나를 전연 동정하지 않고, 기꺼이 숙명으로 감내한다. 우리가 느낄 불안이란 결국 자유의 실재성이다. 규정된 것엔 어떠한 불안도 없다. 우리 모두 그 불안을 징표삼아, 방종 않게 묵묵히 걸어가야 하리라. 비록 그 결과가 좌절로 나타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무용한 열정'을 불태우지 않을 수 없는, 시지포스와 같은 운명을 타고난 존재이기에.


기억하자,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