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영옥 Dec 09. 2021

나의 '오빠'는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뮤지컬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니, 어떤 작품을 가장 먼저 쓸까에 대한 고민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가 시즌10 공연을 시작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를 보고 나니,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했는지 스스로가 한심할 지경이었다. 1화는 당연히 <사랑은 비를 타고>가 되어야 할 터이다. 한국뮤지컬史에서 이보다 더 많이, 이보다 더 오래 사랑받은 뮤지컬이 또 있을까.


'아직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는 다소 상투적인 수식어가 가장 어울릴 뮤지컬 또한 <사랑은 비를 타고>일 것이다. 열 번째 시즌이 언제를 기준으로 열 번째인지는 모르겠으나 거슬러 올라가면 제일 처음 이 작품이 탄생했을 때의 달력에는 1995라는 숫자가 찍혀있다. 무려 약 25년 전.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 초연 캐스트의 티켓


 초연은 보지 못했고 할인권만 갖고 있다.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의 초연은 1995년 9월 20일부터 10월 29일까지였다. 초연의 인기에 힘입어 바로 앙코르 공연이 시작되었고 나의 티켓북에는 바로 이 앙코르 공연부터 2009년까지 총 7장의 <사랑은 비를 타고>티켓이 꽂혀 있다. 


일곱 장의 티켓과 일곱 권의 프로그램북으로 남은 <사랑은 비를 타고>


그 일곱 번의 관람이 모두 기억에 남아있지만 그래도 첫 번째 관람이 가장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는데, '첫'이라는 말이 주는 강력한 충격이나 간질간질한 설렘 때문만은 아니다. 그 첫 번째 공연의 캐스트가 바로 남경읍, 남경주, 최정원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는지 알게 됐다. 지금은 뮤지컬계의 대선배, 뮤지컬계의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리는 배우들의 젊은 날을 내가 공유하고 있다는 흐뭇함. 전설로 회자되는 그 공연을 보았다는 뿌듯함. 레아 살롱가의 <미스 사이공>이나 사라 브라이트만의 <오페라의 유령>을 보았다면 아마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사랑은 비를 타고>가 지금까지 사랑을 받는 것을 초연 캐스트가 훌륭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건 어불성설. '사랑은 비를 타고'의 장점은 귀에 쏙쏙 들어오고 공연이 끝난 후에도 마음에 남는 넘버가 많은 아름다운 음악과 전 세대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감동적인 스토리에 있다.


어릴 때는 특히 유미리에 감정 이입이 많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는데, 나만 늘 뒤쳐지는 것 같고 내가 하는 일은 다 엉망진창이라고 느껴지고 그래서 빨리 나이를 먹고 싶고... 그런 유미리를 향해 동현이 부르는 '언제나 그땐 누구든지 실수를 하지, 지나고 나면 누구든 후회하지'라는 노래가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 (이후 가사는 많이 바뀌었다.) 


마지막 공연을 볼 때는 동욱과 동현의 모습에 눈물이 흘렀다. 25살에 부모님을 여의고 남은 가족은 세 동생. 첫째 동생은 대학생, 둘째 동생은 고3수험생, 막냇동생은 피아노 콩쿠르에서 일등하던 촉망받는 예비 피아니스트. 동욱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때부터 동욱의 인생에 자신은 없고 동생들만 남게 된 것. 그 마음에 어떠한 목적이 있거나 거짓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동욱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고 희생이었고, 그 최선과 희생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 하지만 동생들은 달랐다. 자신만 바라보는 형이, 오빠가 답답해서 직장으로, 결혼으로, 바다로 도망쳤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형을 찾아온 동생. 떨어져 있던 시간의 길이만큼 서로에 대한 오해와 마음의 상처는 깊었다. 둘 다 잘못은 없는데, 둘 다 최선이고 사랑이었는데 왜 아프고 힘들어야 했는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면서도 위태로운 관계인 '가족'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공연이었다. 


이렇게 십 대의 관객도 이십 대의 관객도 삼사십 대의 관객도 감동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은 비를 타고>의 매력이다.


실황 녹음 테이프도 갖고 있으나 많이 들으면 늘어날까봐 이제 와서 들으면 테이프가 끊어질까봐 듣지 못한 지 오래이다.



그리고 재미있는 포인트 하나 더! 


오랜 세월, 앙코르에 앙코르를 거듭하면서 가사가 수정되기도 하고 시대적인 것들을 반영하게 되는데 유미리와 동현이 동욱의 생일 축하 파티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 1996년 공연 때는 룰라의 '엉덩이 춤'과 박진영의 '날 떠나지마 춤'이 등장했다. 2009년 공연에서는 나훈아의 바지 장면과 채연의 춤이었는데 최근 시즌의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는 주인공들이 과연 어떤 춤을 췄을지.


설령 지금 다시 공연을 본다고 해도 무슨 춤인지 알아채지 못할 거라는 슬픈 예감이 들기는 하지만 당대에 제일 화제가 되는 가수가 누구인지를 엿볼 수 있는 그런 소소한 재미 역시, <사랑은 비를 타고>가 주는 즐거움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지난 25년 간 <사랑은 비를 타고>를 사랑해 온 이유는 사비타 속 동현이들이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 배우였기 때문임을. 그리고 첫 번째 사비타를 가장 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도 당시의 동현이었던 남경주 배우가 내 인생의 첫 번째 '오빠'였기 때문임을. 젊고 빛나던 오빠의 그 시간을 떠올리면 나 역시 어리고 수줍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을 그 오빠는 알까?







덧붙임1


나의 '오빠'의 계보는 그 이후 서영주, 김학준 배우로 이어진다.


덧붙임2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는 뮤지컬 스타 등용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프로그램 북을 들춰보면 지금은 내로라하는 뮤지컬 배우들의 신인 시절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왼쪽부터 오나라, 최민철, 윤공주 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