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소희>
문제의 원인을 얼마만큼 구조에서 찾느냐. 이 기준으로 문명의 발달 정도를 가늠한다면, 한국은 아마도 OECD에 속하지 못할 것이다. 계속해서 되풀이되는 문제가 있다면, 그건 한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의 결함 탓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어떤 문제가 터졌을 때, 피해자의 덕성과 품성을 파헤치곤 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10·29 참사에 대한 여론을 보면 된다. 놀러 가서 죽었는데 국가한테 왜 따지냐, 죽은 이들이 마약을 한 것은 아니냐 등의 반응이다.
이 정도만 해도 반발이 찾아온다. 모든 게 다 사회 탓이면 개인에겐 잘못이 없다는 거냐, 그런 식으로 나라만 원망하면 결국 본인만 손해다, 어떻게 다 바꾸면서 살겠어요 그냥 적당히 맞춰가며 사는 거지, 같은 말이다. 조롱도 있다. 사회 탓만 하는 사람을 보면 저는 기분이 좋아져요, 일단 한 명은 제친 셈이거든요.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박정희의 ‘하면 된다’와 같은 문구를 외칠 것이고, 인터넷 밈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결국 너의 행태는 ‘해줘’에 불과하다고 비꼴 것이다.
왜 개인의 의지가 필요 없겠는가. 분명한 작동 원리를 논할 순 없어도, 어떠한 구조도 개개인의 움직임과 상관이 없을 수 없다는 걸 누가 부정하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구조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레닌의 화끈한 말을 인용한다. “우로 굽은 막대를 바로잡으려면 의도적으로 좌로 힘을 줘야 한다.” 모두가 개인의 의지를 강조하는 형국에선, 문제의 원인이 개인에게도 있고 구조에도 있다는 식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다. 하나마나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에선 모든 문제가 구조 때문에 벌어진다는 이야기만이 중립적이다. 힘이 한쪽에만, 즉 개인의 의지를 강조하는 쪽에만 쏠려 있는 형편이니까.
소희(김시은)는 일방적인 압력 때문에 숨이 막혔을 것이다. 생의 마지막, 소희가 카스 두 병을 마신다. 잠깐의 사회 탓도 허용할 수 없다는 듯이, 소희의 뒤에는 예쁜 꽃 그림과 함께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내가 웃으면 세상이 나를 향해 웃어준다.” 소희는 이제 이 모든 상황이 내가 웃지 않은 탓인 것만 같다. 내 의지가 약해서 학교의 취업률이 떨어질 것이고, 내가 잘못해서 학교의 취업 티오가 줄어들 것이고, 내가 못나서 학교 후배가 피해를 입을 것이고, 또 내가 부족해서 회사 동료의 노동이 늘어날 것이고….
부당함에 맞설 줄 아는 소희건만, 그렇기에 술집에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남자에게도 대항했건만, 그런 소희도 지금 이 상황에선 누구에게 저항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부모님과 선생님과 직장 동료와 상사 모두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그냥 참아야만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다들 원래 그런 거라고, 모두들 그러고 산다고, 사회는 변치 않는 거라고만 말한다. 그러니 소희는 자기를 벌할 수밖에 없다. 모두가 사회에는 잘못이 없다고들 하니 말이다.
형사 유진(배두나)은 개인만을 탓하는 경향에 깔려 죽은 소희의 궤적을 좇는다. 소희가 빠져 죽은 저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유진. 물결이 흡사 서로 얽히고설킨 구조의 그물인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역시 사회인이고, 한 명의 개인이다. 유진 역시도 똑같은 구조에 의해 고통받는다. 경찰 상사는 여고생의 자살 사건에 힘을 낭비하지 말라고, 그만 사건을 정리하라고 유진을 압박한다.
구조에 속한 유진이 구조의 얽힌 실타래를 추적한다. 소희가 속한 회사에선 뒤엉킨 관계망을 활용하여 노동자를 착취하기도 하고 동시에 노동자의 죽음에 대한 변명을 내세우기도 한다. 먼저 노동자에겐 네가 일하지 않으면 팀이 고생한다고 말한다. 그 후에 형사에게는 회사의 규정과 사회의 상규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한다. 소희를 콜센터 회사에 보낸 교사와 학교 측은, 자신들도 교육청 방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말한다. 교육청에선 교육부의 지침에 따라서 지도할 뿐이라 달리 할 수 없었다고 답한다.
결국 모두는,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서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정한 규칙에 따라 모든 게 작동하고 있다고 답한다. 정치적, 사회적 문제의 난점이 여기에 있다. 사건의 원인이 제도와 구조, 심리와 품성, 개념과 사유, 의지와 행위 모두와 관련이 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정주리 감독은 작품의 제목을 <다음 소희>로 정했다. 이는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가 비극의 원인을 개인의 심리, 품성, 의지, 행위에서만 찾고 있음을 고발하려는 건 아닐까. 한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같은 참사가 반복된다면, 그것은 분명 개인의 탓이 아닐 것이다. 혹은 개인의 탓만이 아닐 것이다. 다음의 소희가 없으려면, 원인을 개인이 아니라 구조에서 찾아야 한다. 당연히 까다로운 일이다. 구조라는 말에는 제도, 법률, 상식, 관습, 정신상태(mentalité), 환경 등의 어려운 요소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개인을 벌하고, 개인을 독려하는 데에만 집중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