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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승환 Feb 23. 2024

1980년대 안동의 필름 소사이어티 이야기

한국 필름 소사이어티 이야기 - 임인덕 신부의 영화 사역과 '열린 영상'

한국영상자료원이 2021년 "1970~1980년대 한국 주재 해외문화원의 활동과 영화문화의 변화"를 주제로 한 구술사 사업을 진행하는 등 영화제작, 상영, 배급 등 산업이 아니라 문화의 영역에 대해서도 집단 기억의 역사를 만들어 오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구술 기록이나 성하훈 기자가 쓴 <한국영화운동사> 시리즈,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서울영상집단이 쓴 <변방에서 중심으로> 등 영화운동 혹은 독립영화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이 7~80년대 주류 영화 상영 제도 밖의 영화 활동을 기록할 때 주로 접근하는 방식이 프랑스문화원, 독일문화원 등 한국 주재 해외문화원의 활동이다.      


198~90년대 새로운 한국영화를 이끌었던 세대들이 프랑스문화원이나 독일문화원에서 영화를 보았던 기억 때문인 듯한데, 사실 이런 문화적 세례는 해외문화원이 있는 지역에 국한해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주로 서울 중심으로만 기록되는 경향이 있지만 부산에서도 프랑스문화원을 중심으로 상영과 감상 활동이 있었다.      


해외문화원은 없지만, 내가 살았던 경북과 대구에도 197~80년대 영화제도 밖의 영화 상영과 감상 활동이 있었다. 뭐가 있었나 싶으시겠지만, 두 가지 명칭을 언급하면 "아~"하고 기억하실 분도 계실 거다.     


바로 ‘분도출판사’와 ‘베네딕도 미디어’다.      


분도출판사는 197~80년대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과 브라질의 마틴 루터 킹이라는 돔 헬더 카마라 주교의 <정의에 목마른 소리>를 비롯해, <꽃들에게 희망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 등 분도 우화 시리즈, 아동문학가 권정생의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초가집이 있던 마을>, <몽실언니>와 김지하 시인의 시집 <검은 산 하얀 방>과 산문집 <밥>, 그리고 <내 혼에 불을 놓아> 등 이해인 수녀의 시집과 산문집,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집 <인간> 등을 발행했다.     


<잠입자> VHS 자켓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십계> VHS 자켓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그리고 베네딕토 미디어는 잉마르 베리만의 <겨울빛>과 <침묵>,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거울>과 <잠입자>, 크쥐시토프 키에슬롭스키의 <십계> 시리즈, 안제이 바이다의 <대리석 인간>, <철의 인간>, <재와 다이아몬드>, 애니메이션 <프레데릭 벡의 선물> 등을 출시했다.


분도출판사와 베네딕토 미디어는 성 베네딕토 왜관수도원에 속한 출판사인데, 이 출판 사업과 미디어 사업을 이끈 사람이 독일인 임인덕(독일명 하인리히 세바스티안 로틀러) 신부였다.     


 

임인덕 신부 (출처 조선일보)


1935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난 임인덕 신부는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입회하며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뮌헨대학교에서 종교심리학을 공부하고 1965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듬해 한국 왜관수도원에 선교사로 파견됐다. 1972년 분도출판사 사장으로 부임해 20여 년간 400권의 책을 출판했고, 영화로도 사역했다.      


한국에서 사역을 시작한 지 2년 정도 지난 때부터 슬라이드 필름 상영을 시작으로 영화 상영을 통한 사역 활동을 꾸준히 진행했다. 임인덕 신부는 외국영화의 대본을 직접 번역하고, 왜관까지 성우들을 불러 한국어로 더빙하여 교회, 대학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초청하는 곳에 가서 상영했다. 종교 관련 영화만 상영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종교와 관련되지 않은 영화를 더 많이 상영했다고 한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종교적 소재의 영화가 아니라 인권과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예술영화를 통해서 더 잘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민중이 스스로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을 다루는 영화를 상영하고 토론하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안동시민회관 (출처: 경북기록문화연구원)


임인덕 신부님은 1980년대 내가 살았던 안동에서 ‘열린 영상’이라는 씨네클럽도 운영하셨다. 안상학 시인은 <분노의 포도>(존 포드, 1940), <길>(페데리코 펠리니, 1954), <무방비 도시>(로베르토 로셀리니, 1945),<워터프론트>(엘리아 카잔, 1954),<사계절의 사나이>(프레드 진네만, 1966) 등과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스>(1936), <황금광 시대>(1925), <위대한 독재자>(1940) 등이 상영되었다고 기억한다. [극장뎐(傳) 3] 극장에서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


안동 출신인 다큐멘터리 <느티나무 아래>의 오정훈 감독님도 참여하셨다고 하는데, 나도 이 상영회에 참여했다. 그때 봤던 영화와 상영회 분위기가 지금도 기억난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는 <키드>, <시티 라이트> 등 찰리 채플린의 영화였다.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기 전이었는데, 이 영화들은 16mm 필름으로 상영되었다. 무성영화를 상영하던 조용하고 차분했던 분위기가 지금도 기억난다.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16mm 영사기가 돌아가던 소리, 그리고 자주 터졌던 웃음. 극장과 완전히 달랐던 그 상영회를 잊을 수 없다. 상영회 이후에는 참석자 간의 토론 시간도 진행되었다고 한다. 나는 참석한 적이 없지만, 그 자리를 통해서 관객들은 시민으로 조금씩 각성했을 것이다.


찰리 채플린 <키드>


안동 씨네클럽에서 영화를 봤던 경험은 이후 주류 제도 밖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활동을 하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98년 초 제4회 서울단편영화제 전국 순회 상영, 대구 씨네마떼끄 아메닉의 독립영화 정기상영회, 인디포럼 대구 상영, 서울 독립예술제의 암중모색, 그리고 정동진독립영화제 등에서 16mm 영사기로 필름 영화를 상영하는 일을 종종 했는데, 과거의 행복한 경험을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 행복했다. 지금은 필름으로 영화를 상영하거나 관람할 기회도 없어 이런 경험을 나누기 어렵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 봤으면 하는 낭만적인 일이다.


임인덕 신부님은 2013년 10월 선종하셨다. 그의 생애는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197~80년대 다른 지역에서는 또 어떤 종류의 비제도권 영화 상영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자신의 경험을 함께 나눠주셔도 좋겠다.



원승환

서울 홍대입구에 위치한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영화산업과 독립․예술영화, 글로벌 영화산업에 대해 글을 씁니다. 일반적인 관점과 다른 관점의 글을 쓰고자 합니다. 과거 글들은 블로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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