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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승환 May 31. 2024

시네클럽(필름소사이어티): 영화의 미래를 위한 공동체

지금 시네클럽과 필름 소사이어티를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


지금 우리나라의 영화산업과 문화에서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할 것 중 하나는 '시네클럽 혹은 필름 소사이어티'다. 


유럽에서 시네클럽과 필름 소사이어티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던 1910~30년대, 미국에서 필름 소사이어티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던 1940~60년대와 같은 시기 우리나라에서는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 같은 활동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1947년 11월에 발행된 프랑스 시네클럽 연합 기관지


일제 강점기, 해방공간, 한국전쟁,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 등은 시민의 자유로운 공동체 활동과, 영화는 물론 예술의 자유로운 창작과 감상, 토론을 통제하고 검열했다.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 이후에야 시네클럽이 이야기되고 조금씩 만들어졌고, 1990년대 (VHS 매체와 함께) 폭발한 것에는 이런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배경이 있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나라에서는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가 영화의 역사 안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라든가, 영화산업과 문화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가 충분하게 논의되지 못했다. 


필름 소사이어티가 운영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극장 Film at Lincoln Center, 2019년까지 Film Society of Lincoln Center로 불렸다.


1990년대는 한국 역사에서 거의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가 전국적으로 활성화된 시기였다. 


이 배경에는 [시네필의 시대]에서 이선주 교수가 지적하는 수용자 운동으로서의 비디오 산업의 등장, 문화학교 서울 등의 시네마테크, [영화언어], [KINO], [필름 컬처] 등의 잡지와 이론, 비평, 그리고 제도로서 등장한 예술영화전용관 등이 있다. 


여기에 몇 가지를 더 보태자면 유통시장과 영화시장의 개방, 공산권 문화의 개방,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문민정부의 등장, 경제 발전, 영화진흥법의 도입과 사전검열 위헌 판결, 케이블TV의 등장 등이 있다. 


이선주 [시네필의 시대]

하지만 1990년대를 시네클럽 혹은 필름 소사이어티라는 개념으로 읽어내진 않는다. 생소한 단어이고, 존재하지 못했던 경험이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나라에도 시네클럽 혹은 필름 소사이어티의 역사가 존재했지만, 각각의 경험은 단절적으로 이해될 뿐, 통시적으로 이해되지 못했다.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에 대한 이해가 명확해야 영화 관객이나 영화 감상, 영화 문화, 제도로서의 극장과 극장 밖의 영화 상영과 감상문화 등이 해명될 수 있고, 논의가 확장될 수 있다. 


커뮤니티 시네마에 대한 이해와 접근도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면 훨씬 더 풍성해질 수 있다.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와 커뮤니티 시네마는 다르다. 둘 다 영화를 상영하고 감상하는 모임이나 조직을 이르지만, 영화에 어떻게 접근하고 이해하는가는 차이가 있다. 


커뮤니티 시네마는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의 존재가 어느 정도 필수적이다. 해외의 주요한 커뮤니티 시네마 사례에는 대부분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의 역할이 주효했다. 다르게 표현하면 커뮤니티 시네마는 시네클럽과 필름 소사이어티가 잉태한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커뮤니티 시네마인 시네마테크 다카사키


커뮤니티 시네마는 과거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 활동 중 하나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며, 좀 더 구체적으로는 변화한 지역의 경제와 문화 환경에 따라 지역(공동체)을 재생하기 위해 영화와 영화관을 활용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개인이나 시네필의 (유무형의) 공동체가 아니라 지역이라는 유형의 공동체를 구체적으로 호명한다는 점에서 커뮤니티 시네마는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와 다르다.


어떤 측면에서 커뮤니티 시네마는 시네필의 활동이 아니기도 하다. 이 표현은 커뮤니티 시네마가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보다 열등하다는 말이 아니다. 커뮤니티 시네마의 구성원은 시네필이 아닌 경우가 많은데, 이는 두 활동 지향의 차이에 따른 것일 뿐 우열의 문제는 아니다. (시네필이 시네필이 아닌 사람보다 우월한가?)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는 지역민을 시네필로 호명하지만, 커뮤니티 시네마는 지역민을 ‘시민’으로 호명한다.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에게는 영화라는 작품과 이 텍스트를 둘러싼 맥락이 중요하지만, 커뮤니티 시네마에게는 영화를 함께 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중요하고, 지역을 어떻게 미래가 있는 곳으로 바꿔 갈 것인가라는 맥락이 중요하다. 이 둘은 완전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구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시네클럽 Cercle du cinéma을 운영하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설립한 앙리 랑글루아


다시 서두로 돌아가서 지금 우리나라 영화산업이자 문화에서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를 중요하게 논의해야 하는 것은 관객 개인이 아니라 관객 공동체가 산업과 문화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가 영화를 보는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보다 나은 곳으로 바꾸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도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자가 시네클럽이나 필름 소사이어티의 역할이고, 후자가 커뮤니티 시네마의 역할이다. 이것이 관객으로부터 시작되는 수용자 중심의 영화 운동이며 영화 제작이 아니라 영화 감상이 하는 사회적 역할이고 기능이다. 영화의 사회적 역할이나 기능은 제작 단계에서가 아니라 상영과 감상, 그리고 감상 이후에 발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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