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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와 금문교, 그리고 24살의 나

8월 22일, AJ 미디어 루키즈 김보승의 기록

https://www.youtube.com/watch?v=TnTxWSKJ30g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히피문화의 탄생은 샌프란시스코였다. 젊은이들이 기존의 사회 통념이나 제도, 가치관을 부정하고 인간성의 회복과 자연으로의 귀의 등을 주장했다. 이들은 머리에 가슴에, 그리고 총구에도 꽃을 달았다. 평화의 가치를 내세우며. 나는 이것을 스콧 매킨지의 ‘San Francisco”라는 오래된 노래 때문에 알게 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에서 주인공이 Minnesota에서 San Francisco로 이사하는 사건이 굉장히 크게 그려진다. 미국 북부에 위치해 눈이 많이 오고 거의 평지로 이루어진 미네소타에 비해 샌프란시스코는 평지가 없이 굴곡이 심한 도시로 대비가 강조된다. 주인공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마자 Golden gate bridge(금문교)를 마주하게 되고, 이러한 장소의 ‘전환’과 ‘이사’라는 사건은 주인공의 정신적 성숙의 계기로 작용한다.

<인사이드 아웃 영화 속 금문교>

나에게 샌프란시스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의 주인공이 사는 곳이자, 올드팝의 가사처럼 사랑과 자유가 넘치는 곳이었다. 그래서 22일 하루의 자유여행은 굉장히 의미가 컸다. 많은 사색에 빠졌던 날, 하루가 온전히 아름다웠던 날, 그리고 꼭 한 번 이곳을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했던 날이다. 이날의 하루는 금문교 위를 걸으면서 시작해 그 아래에서 저물었다. 흔들리는 크루즈에 몸을 맡기며.

“하나 둘 셋 숨 딱 참고 낙하”


<필름카메라에 담긴 그날의 금문교>

초심자의 행운이었던 건지 날씨가 너무도 좋았다. 금문교의 시작과 끝을 구경하는 데 있어 우리의 시선을 해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안개와 구름,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쨍한 햇빛은 다리의 색을 더욱 진하고 빨갛게, 그리고 가끔은 금색으로 만들었다. 착시였을 수도 있겠지만.

골드러쉬의 배경 속, ‘꿈’과 ‘희망’을 상징하며 만들어졌던 다리지만 그 둘은 때때로 아주 쉽게 좌절되고 우리를 배신하기 때문일까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철조망을 설치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리가 품었던 가치와는 역설적이었지만 한편으로 딱히 이질적이지도 않은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꿈을 꿀 수 있지만 모두가 꿈을 이루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니까.


다리에서 떨어지는 행위. 단순히 그 행위가 꿈과 희망, 생명을 스스로 포기함과 얼마나 관련성이 있을까? 캘리포니아 주의 금문교 공사는 다양한 국적의 이민자들에게 돈을 벌 수 있는 중요한 기회였다.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중국인이었고 이들은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말로 통하지 않는 미국으로 건너왔던 것이었다. 인종 차별은 당연했고 짙은 안개와 강한 바람 때문에 4년간의 공사 동안 약 40명의 중국인이 사망했다. 그러나 지금 현재 그들의 후손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만들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 냈다. 샌프란시스코 내 중국인 비중이 21%에 달할 만큼. 그들이 품었던 꿈과 희망, 그리고 의도치 않았던 가슴 아픈 추락은 누군가에게 기폭제가 되었고 또 끈끈한 단결력이 되었을지 모른다. 중국인과 금문교,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깊은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금문교의 색깔이 빨간색인 것일까?  


“명분에 관하여”

시끌벅적하게 공사 중인 금문교를 보며 ‘명분’에 대해 생각했다. 다리길이만큼의 철조망을 설치하는 게 하나의 소중한 생명을 지키기 위함일지, 샌프란시스코의 명예에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함일지, 다리라는 것이 애초에 사람이 뛰어내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으로 그 목적에 맞는 쓰임을 위하는 것일지. 사람에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없을까?라는 생각이 사물의 쓰임이 무엇에서 비롯되는 것일지에 관한 생각에까지 가 닿았다. 공사의 명분은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사물의 쓰임은 내가 생각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다리”라고 했을 때 신체의 다리를 떠올리느냐 차와 사람이 건너는 다리를 떠올리느냐가 생각하기에 달린 것처럼.   

멀리서 보았을 땐 몰랐지만 다리의 중간쯤 가보니 뛰어내리는 것에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함이 느껴졌다. 인생을 살아갈 용기를 가지는 것이 힘들까? 다리에서 뛰어내릴 용기를 가지는 것이 힘들까? 이 세상 모든 곳에 철조망을 설치할 수 없다면, 단순히 그곳에 철조망을 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뛰어내릴 의지를 가진 사람이 콧방귀 뀔 일이라 생각했다. 강풍을 버티지 못하고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이 바다로 내던져진 중국인 노동자들과 이들이 뭐가 그렇게 다른 것일까.


“나는 자유롭고 싶다”

크루즈에 올라 오전에 보았던 다리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았고, 사색은 이어졌다. 어쩌다 보니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돛을 올리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힘들고 협동이 필요한 일이어서 놀랐다. 그래,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새로운 항해를 하려면 함께 돛을 올려주고 내려줄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은 혼자라 생각했기에 돛을 올려볼 생각조차 못 한 게 아닐까. 평화롭게 누워서 일광욕을 하고 있는 바다사자들을 보며 내가 저 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고 그냥 내가 사람이긴 한 건지, ‘사람’이라는 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동물 팔자가 사람보다 나아 보이면 차라리 사람이길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 때도 있으니 말이다. 가끔은 그들로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내 팔자와 그들의 팔자를 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참 웃기다.

다리 위에서 보았던 샌프란시스코의 풍경과 드넓은 바다가 자신을 품어주지 않을까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막상 밑에서 내가 느꼈던 바다는 상당히 춥고 거칠었으며 바람은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처럼 가만히 두지 않았다. 물론 그 바람은 크루즈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었겠지만. 누군가는 바다에 닿는 순간 생각했을 것이다. ‘아 춥구나’ 그리고 다시 구해졌을 때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고마움의 감정이었을까 원망의 감정이었을까 원통함과 슬픔, 절망과 희망 그 어느 쪽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없다.

샌프란시스코의 자유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의 자유는 공공의 정의와 충돌하는 때가 많고, 어떤 경우에는 자유를 억압하면서 자유가 생기기도 하기에 자유를 뭐라고 정의하기가 참 어렵다. 자유와 정의, 개인의 자유와 집단의 자유는 공존할 수 있는 말일까. 히피들이 내세웠던 자유는 무엇일까. 누군가는 해변가에 누워, 누군가는 수영을 하면서,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면서, 누군가는 다리에 올라, 누군가는 배를 타며 샌프란시스코의 바다를 느끼고 금문교를 바라보지만, 동상이몽(同牀異夢)이었다. 자유의 다른 말은 동상이몽이 아닐까. 자유는 같은 것을 보고, 읽고 들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가 내린 정의였다.  

 많은 사람들을 품을 만큼 샌프란시스코의 바다는 넓었다. 하지만 넓은 만큼 무섭고 차갑기도 했다.


“If you come to San Francisco

Summer time will be a love - in there.”


여름에는 이곳에서 사랑을 꿈꾸게 될까? 언젠가의 여름에 다시 이곳에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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