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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꽃지 Sep 18. 2024

도자기 빚어 본 적 있나요?

이드, 에고, 슈퍼에고

아무도 허용한 적 없는 등교거부권을 주체적으로 행사하며 소파에 늘어져 점심메뉴를 묻는 열 살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뭐라도 하자!" 타들어가는 내 속을 꾹꾹 누르며 살살 아들을 꼬셨다. "우리 점심 먹고 도예 한번 해보자. 집 근처에 있잖아~"  


흙꽃도예공방

공방은 생각보다 꽤 전문적이었고, 아들은 도예의 매력에 빠져드는 거 같았다. 역시 흙을 만지는 건 사람을 안정시키나 보다. 이 선택에 흐뭇해하며 아들 수업을 매번 따라다녔다. 세 번째 수업이었나? 작업대 옆에서 노트북으로 일하고 있다가, '나도 해볼까?' 호기심이 들었다.


일직선으로 25CM를 반듯하게 올라가는 꽃병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들이 하는 걸 볼 때는 몰랐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한 단, 한 단, 내 살을 붙인다는 생각으로 정성껏 흙반죽을 이어 붙이는데 꽃병은 단이 올라갈수록 벌어지며 모양이 흐트러진다. '아. 그냥 딴 거 만들까?' 싶은 생각과 '그래서 내가 뭐 하려고 했지? 벌어져도 뭐 괜찮지 않나?' 협상과 초심을 찾기 위한 내적 갈등이 시작됐다.

그때 선생님이 오셨다. 수동 물레를 한 번 휙 돌리며 지긋이 두 손으로 누르시는데, 그 회전이 끝나기 전 원통으로 모양이 잡힌다.


'아. 이런 게 <다스림>이라는 건가?
 손물레도 이렇게 어려운데 휭휭 돌아가는 전기물레는 장난 아니겠구나!,  
 아..... 근데, 지긋하게 누르는 그 손동작은 압력 pressure이 아니었어.
 그건 안으로 들어가라는, 똑바로 올라가라는 요구가 아니라
 그 길이 아니라고 어깨를 감싸며 이끄는 보호 protection 같은 거였어'



토기장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예레미야 17:6)

'하나님이 빚으신다.'라는 말씀은 나에게 늘 힘들었다. 신앙이 있음에도 안으로 들어갈 없는 이유였다.

왜 처음부터 모양도, 흙도, 완성품도 다 계획하실까? 왜 모든 주권은 창조주에게 있으며 우리는 빚어지고 다듬어져야만 하나. 사람은 무엇인가? 뜻대로 이끌기 위해 사람을 길 들이고, 길 들이기 위해 재앙으로 치고 괴로움을 주시는 그래서 주저앉히는 신앙, 바닥을 찍고 힘을 얻는 '구원 같은 신앙'이 나는 힘들었다. 아무리 다르게 여러 해석의 설교로  이해하려 해도 늘 같은 이 지점으로 되돌아왔다. 그래서일까? 20살 이후로 "네가 크리스천이야?"란 말을 꽤 자주 들었다.

뭐, 그렇게 보일 수 있었다. 크리스천이라는 정체성을 잃진 않았지만 이민자처럼 다른 세상에 살았으니...

믿으면서도 믿는 삶을 등지고 있었던 이유는 이 말씀이  도저히 소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지켜보는 또 다른 나, 초자아 super ego


지금은 흔한 상식이지만, 라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같은 심리학 어휘가 흔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 교양수업에서 처음 들었다. 그땐 '사람이 생각이 과하면 취향에 따라 이렇게까지 파고들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근데 왜 그때 심리학 교수님은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인 <사람의 세 가지 자아>에 대해서는 말해 주지 않았을까. 요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말하는 원초아(id), 자아(ego), 초자아(super ego)를 접하며 이제야 그의 이론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다가왔다.

경험하는 나 -원초아(id)
기억하는 나 -자아(ego)
바라보는 나 -초자아(super ego)

경험하는 나를 기억하는 내가 기억으로 이어가고, 그런 중첩된 기억을 바탕으로 현재 경험하는 나를 바라보는 내가 있다는 것이다. 이드, 에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초자아로  인식하면 <나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이 생긴다.


갑자기 왜 이드, 에고, 슈퍼에고를 말하냐면,

흙반죽을 올리면서 나는 나의 슈퍼에고를 봤기 때문이다.



흙이 아니었음을

"만드는 이는 창조주 토기장이, 나는  그의 뜻대로 빚어지는 흙이 아니었다. 지금 도예를 배우고 있는 나처럼 선생님과 같은 결과물을 생각하며  물레를 돌리고 있는 지금의 나, 바로 이 작품이 완상되면 제작자가 되는, 흙반죽을 만지고 지켜보는 '나'였다."'는 인식이 머릿속에 선명해졌다.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도예를 배우고 있는 지금의 나,
서툰 솜씨로 흙반죽을 다루지 못하는 서툰 나,
그래도 이 도자기의 <만든 이 made by>가 될 나,

이 토기의 주체는 흙이 아니다.

빚고 있는 내가 주체이다.

나는 <나라는 주체>로 모든 주권을 가진 하나님 옆에 서서 처음부터 함께 토기를 빚는 자였다.

여태 반죽이 적절하지 않아 계속 이리 섞기고 저리 치대지고 있었던 거다.


나는 이제서야 반죽이 됐다.

나는 이제서야 물레 위에 올라왔다.

이제 물레 위에서 하나의 작품이 될 것이다.

어떤 작품이 될 건지는, 주님이 아신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무엇이든 될 거라는 것을...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것을...


나는 주님께 언제나 하나의 주체였다.


무엇을 만들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만드는 방법을 배우러 온 제자처럼 말이다.



막힌 물줄기가 뚫렸다.
나는 어떤 토기가 될까?
일단 작지는 않을 듯하다.
너무 많은 시간 흙을 모으고 치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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