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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과사색 Jun 06. 2023

그러니까 너도 해

쟤도 하더라

엄청난 날이었다.

스타트업들과의 미팅이 몰아친 날이었다.

내 맞은편에 앉아있는 스타트업 대표들을 보면서, 현재 우리 회사 프로젝트에 대한 협업을 논의하느라, 그리고 몇 년 후 나 또한 그들처럼 대기업과 협업을 논의하는 모습을 상상하느라 머리가 바쁜 하루였다.


매칭데이에는 헬스케어 분야의 스타트업 12팀 가량 참가했다. 각 팀당 10-15분 정도의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미리 매칭된 대기업과 1:1로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행사였다. 잘 되면 투자나 협약으로 이어지는, 스타트업 입장에서 매우 고대하는 기회이며 행사이다.


사실 우리 회사와 협업할 만한 스타트업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참가한 스타트업들이 아직 너무 미약해서였다. 헛걸음이 분명했지만, 나도 몰래 헬스케어 스타트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 뭘 하나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으로 가볍게 방문했다.


그리고 이 날 나는 머리를 세게 몇 대 얻어맞은 경험을 했고, 새벽 두 시까지 잠들지 못했다.


첫 번째 놀라움은 세 번째 스타트업 대표가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할 때였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등까지 늘어트린,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 대표가 커다란 눈을 꿈뻑꿈뻑이며 단상에 올랐다. 청중들은 팔짱을 끼고 있거나 다리를 꼬고 있거나 고개를 약간 틀어 아이스커피를 쪽쪽 들이마시는 약 200명의 대기업 놈들이다 (내가 딱 이러고 있었다). 400개의 매의 눈이 쏘아보았고, 여성 대표의 얼굴은 벌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표를 진행하면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는 마이크로 증폭되어 더 크게 덜덜거렸고, 발음이 자꾸 꼬이고 뭉개졌다. 목소리도 잠자리 날갯짓 같았다. 오히려 듣는 내가 불안해지는, '제발 좀 더 잘해봐'라는 응원을 하게 되는, 정말 긴 10분의 발표였다. '너 큰일 났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투자를 받을래...'라는 걱정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걱정도 팔자. 여기서 내가 이미 놀랐던 점은, 저렇게 긴장을 많이 하고 간이 콩알만 한데 대기업들이 오는 매칭데이에 신청했다는 것, 발표하는 날 도망가지 않고 왔다는 것, 재수 없는 대기업 놈들 앞에서 끝까지 발표를 마쳤다는 것이다. 부딪히는 용기였다. 여기까지 왔을 정도면 이미 수많은 발표와 행사에 참여해서 본인의 부족함을 적나라하게 봤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을 알면서도 부딪히는 용기였다. 실수하고 긴장하고 초라해지는 본인을 또 마주할 수 있는 용기. 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용기를 끌어올리고, 자신의 결점을 나와 너 모두에게 구경시키면서, 결국 도전을 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곧 울 것만 같던 커다란 눈과 떨리는 목소리가 나머지 9팀들이 발표를 끝낼 때까지 떠나질 않았다. 그녀만큼 발표를 못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발표는 이골이 난 듯이 사기꾼 혹은 약장수 같이 발표하는 대표들이 대다수였다. 그녀를 보면서, 또 그 외 다른 모두를 보면서 (극과 극의 두 예를 보면서) 발표는 정말 꼭 제발 새끼손가락 걸고 반드시 제대로 잘 준비해서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12개의 발표가 모두 끝나고, 대기업과 스타트업이 약 15분 동안 1:1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각 스타트업의 부스에서.


우리 회사의 첫 스케줄은 그녀의 스타트업이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었다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왜 팀원도 없이 혼자 왔어!" 하고 등짝을 때려주고 싶었다.


나와 동행한 직장 동료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질문을 퍼부었다. 가시 있는 질문들이었다.


"시장에 비슷한 업체들이 많은데, 딱히 차별점이나 뛰어난 점을 보질 못했다. 있다면 말해봐라", "비즈니스 모델이 뭐냐? 수익 모델은 뭐냐?", "수익은 나냐? 현재 매출이 얼마냐?"


사실 내 눈에도 아이디어, 차별성, 경쟁력이 별 볼 일 없어 보였다. 그녀의 초라한 어깨만큼이나 그녀의 회사 또한 초라했다. 그녀의 답변도 초라했다. 잠자리 날갯짓 같은 목소리로 꾸역꾸역 설명하고 있으나, 알맹이 있는 내용이 없었다. 그게 그녀 회사의 한계이니까. 너무 별 볼일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매칭데이에 까지 선발되어서 온 것이 대단하고 신비로운 것이다.


그리고 난 내심 안도했다. 내 예상이 맞아서. 별 볼 일 없는 회사여서. 곧 나도 뛰어들 헬스케어 시장에서 막강한 아이디어나 기술을 갖추고 있지 못해서 좋았다. 그리고 초라한 그녀가 초라한 아이디어와 기술을 가진 것이 일관되어 좋았다. 만약 생각보다 성장가능성이 큰 회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초라한 그녀에게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초라하지 않은 나에게도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쟤도 저렇게 하는데 너는 뭐 하고 있냐고.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안도만으로 끝나지 않은 어딘가 찝찝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게 뭘까. 나는 오늘 한 인간의 위대한 용기와 도전을 보았고, 마음으로 응원했다.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내 경쟁사가 될 만큼 성장하지 못할 회사라는 것을 확인했다.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왜 찝찝할까.


그녀의 이름과 스타트업 이름을 검색했다.


두 번째 놀라움이 왔다. 그녀는 내가 그토록 열망하는 것들을 이미 다 해내고 있었다. 이런저런 창업을 해보며 10년 동안 경험을 쌓았고,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어서 MBA를 이수했고, 내가 안달나 있는 정부지원사업에도 합격했었다. 현 스타트업은 벌써 4년 전에 창업해서 3년 전에 5억 투자를 받았고, 혁신기업가 라며 인터뷰한 기사가 꽤 많았다. 기사 속 그녀의 사진은 여전히 커다랗고 말간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조금 더 또렷해 보였다.


무시했는데 생각보다 잘하고 있어서 놀란 게 아니었다. 내가 그렇게 목말라하는 투자를 잘도 받아내서 배가 아파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의 끈기에 놀랐다. 잠자리 날갯짓 같은 목소리로 10년 동안 존버를 하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중간에 그만두지 않아서 놀랐다.


스타트업을 준비한다며 겨우 깔짝대면서도 나는 이것이 길고 지치는 여정이라는 것을 느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종종 찾아오고, 그런 두려움을 생산해 내는 나의 무의식과 싸워야 한다. 그냥 '나 죽었소' 하고 존버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믿고 가는 마음과 실행이 동시에 필요한 것. 그래서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 것 자체가 존경스러운 것.


그래서 그녀의 용기와 끈기를 생각하다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 뒤로 묵직하게 존버하고 있는 그녀를 떠올리다가, '쟤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까'를 생각하다가, '쟤만큼 나도 용감하고 끈기 있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새벽 두 시가 되었다.


그리고 생각에 지쳐 이제 그만 생각하고 잠들고 싶었다. 그래서 재빨리 결론을 냈다.


쟤도 하니까 나도 하자고. 그러니까 나도 한다고. 할 수 있다고.


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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