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가에 앉는 마음 Jun 27. 2024

883. 의사 파업, 정의란 무엇인가?

주관적 정의를 객관화 시키는 작업

 6월 18일부터 전면 휴진을 예고한 대한의사협회는 '3대 대정부 요구안'을 발표하며, 정부가 요구안을 받아들일 경우 17일 하루 회원 투표를 통해 휴진을 보류할 수 있다고 했다.

o 의대 정원 증원안 재논의 

o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 쟁점 사안 수정 및 보완 

o 전공의·의대생 관련 모든 행정명령과 처분을 즉각 소급 취소, 사법처리위협 중단

 한덕수 총리는 정부입장을 발표했다. ‘정부는 헌법과 법률이 정부에 부여한 권한에 따라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에게 다른 직업에 없는 혜택을 보장하는 한편 일부 직업적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국민 생명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의사뿐만 아니라 철도, 수도, 전기, 항공, 운수사업 같은 다른 필수공익사업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싸움이 너무 지루하다. 현존 또는 잠재적 의료서비스 고객인 국민들은 답답하기 그지없으며 ‘의협의 밥그릇 지키기’와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의 무능’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을 수 있으며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병원을 주기적으로 다녀야 하는 환자입장에서 보면 어떤 이유에서든 예쁘게 봐줄 만한 구석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이기적인 집단’,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종’, ‘돈만 밝히는 히포크라테스’VS ‘탁상 행정’, ‘토론문화의 부재’, ‘밀어붙이기식 일방적 의사결정’ 


 전기 관련 공기업에서 35년을 근무했으며, 재직기간 중 한 번의 합법적인 파업을 경험했다. 비상상황에 대비한 필수요원을 발전소에 잔류시켜야 하니 전면 파업도 아니었으며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들은 과격하지도 않았다. 이슈는 ‘민영화 반대’였으나 정부입장은 ‘시장개방’이었다. 어느 편이 정의로운가? 세상 어떤 일이든 동전의 양면같이 천사와 악마가 공존한다.

 파업 당시 노조원은 아니었으나 조합의 비상대책회의실이 내 책상과 석고보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있었기에 회의 내용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파업에 동참한 대다수의 직원들은 약속한 시간이 다가오자 파업중단 및 현장복귀를 요구했다. 

 본인이 없으면 현장에 남은 동료들의 고충이 눈에 보인다. 또한 전력부족사태로 인해 대규모 정전이 발생하면 내 가족이 불편을 겪어야 함은 물론 산업계, 의료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필수공익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혜택이 있는 반면 법률로 직업적 자유의 일부를 제한받고 있으며 공익을 위해 당연히 제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업대가를 치렀다. 민간에게 일부 시장을 개방했고 독점적 지위는 흔들렸다. 공기업이지만 수주를 해야 하며 매출을 내야 생존하는 공기업이 되었다. 발주처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으며 민간시업 육성 및 경쟁으로 인해 공기업이 파업한다 해도 대체방안이 마련되었기에 걱정이 줄었다. 물론 반대급부도 있었지만 지면이 짧다. 

 *필수공익사업이란 국가 또는 정부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상생활에 필요한 필수불가결한 용역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이다. 여객운수, 항공운수, 수도, 전기, 가스, 석유, 공중위생, 의료 및 혈액공급, 은행 및 조폐 방송 및 통신사업을 말한다. 공익사업장 노동쟁의는 직권중재, 긴급조정 등의 제약을 받는다.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의사파업인지 의료파업인지를 보면서 그들의 주장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근거 없는 의대증원 의대교육 망가진다.’와 같이 의대증원문제로 촉발된 의사파업의 또 다른 쟁점은 필수의료과 기피, 전공의 근무시간 과다. 공공의대 설립반대 등으로 전선이 확대되었다.

 의사들이 언제부터 교육에 진심이었는지 모르겠다. 의대 증원이 되면 수재뿐 아니라 머리 나쁜 학생들이 입학하게 되어 의료서비스의 질이 하락하고, 반도체 등 공학 쪽에는 인재난으로 경쟁력이 저하됨을 걱정한다는데 산업부와 교육부 주장이 아닌 의사협회가 주장하는 이유란다. 물론 가능성 있는 이야기지만 왜 의사들이 그런 부분까지 걱정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적성이 의대가 아닌 수재들도 많다. 그러나 성적만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오만이자 무식을 표출하는 것이다.  


 필수의료과를 기피하고 손쉽게 돈 벌고, 의료사고 걱정이 덜한 피부미용과 성형분야는 선호한단다. 필수의료과에 대한 적정 수가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어 보이나, 적정수가를 보장해서 얻는 수익은 중산층이 생각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자유시장논리에 의해 미용전문의사가 증가하는 것을 제한할 수 없듯 피부미용과 성형전문의사 수를 일정 수준으로 관리할 수도 없다. 의사협회에서 자율정화 능력이 없으니 정부규제를 바라는 차원은 아닐 것이다. 

 공공의대 설립은 지방에 부족한 의료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다. 이를 반대하는 사유가 일정기간 지방근무 후 수도권으로 이사 간다는 것인데, 졸업생들은 매년 배출되므로 개인에게는 일정기간이지만 지방권역단위로는 영속성이 있으므로 경력 10년인 젊은 의사들은 계속 지방에서 진료하게 된다. 선배의사들과 달리 고향 근처에서 근무하고자 하는 젊은 의사도 있을것이니 이것까지 걱정한다는 것은 오지랖이 너무 넓은 것 아닌가 한다.

 또한 전공의뿐 아니라 의사인력의 과로를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인력부족에 의해 야기된 문제인 듯하나 의사가 아니므로 속사정은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전공의들이 격무에도 연봉이 낮다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대형병원이 문제인가? 낮은 의료수가가 문제인가?

 물론 문제해결이 난망한 이유는 졸속적인 정책결정도 있을 것이다. 상대를 설득하지 못했으며 대화의 장도 적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정부의 목적은 정의로웠는지 몰라도 과정은 정의와 멀었으며 미숙해 보이기까지 하다.


 예전에 끄적거렸던 ‘615.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著, 김영사刊)’을 다시 읽어봤다.

 오랜만에 서양 사람이 저자인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느끼는 점이 있다. 토론식 교육의 우월성이다. 이 책은 ‘학생들에게 정의를 다룬 뛰어난 철학서를 소개하고,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는 오늘날의 법적, 정치적 논쟁을 다루는 수업내용’으로 하버드의 교육방식을 소개했다.

 초격차 (권오현著, 쌤앤파커스刊)에서는 스탠퍼드의 교육방식을 소개했다. ‘그동안 어떻게(how)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만 교육을 받았으나, 왜(why) 이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for what)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깨우쳐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자도 제자들과 문답/토론식 교육을 했으나 일제 식민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how)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만 교육받았다. 왜(why), 무엇을 위해(for what)를 알려주지 않았으니 응용력과 창조력이 뒤떨어지고 배운 것을 현업에서 활용하지 못하는 인력만을 양산했다.


‘615.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著, 김영사刊)’

10강 정의와 공동선

 시민의 정체성을 도덕적, 종교적 신념에서 분리하라는 요구는, 정의와 권리를 놓고 공개 담론을 할 때 자유주의적 공적 이성에만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는 선에 관한 특정 견해를 지지하지 말아야 하며, 시민은 정의와 권리를 토론할 때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익히 들어온 두 가지 정치문제를 생각해 보자. 문제의 근본인 도덕적, 종교적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낙태와 배아줄기 세포 연구문제다. 어떤 사람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는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발달 중인 태아의 도덕적 지위는 날카롭게 대립하는 도덕적 종교적 문제로 정부는 중립을 지키고 여성 스스로 낙태를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자는 만약 발달 중인 태아가 사실상 아이와 마찬가지라면 낙태는 영아살해나 마찬가지이므로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잉태된 순간부터 인간이라는, 태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틀렸다고 암묵적으로 단정하는 셈이다. 

 줄기세포 연구 논란도 마찬가지다. 반대하는 사람은 인간은 잉태 순간부터 생명을 얻는다고 믿기에 배아 파괴연구는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찬성하는 사람은 당뇨병, 파킨슨병, 척수손상을 치료할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의학적 혜택을 거론하며 종교적, 이념적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낙태 논쟁처럼 배아줄기세포 연구 허용문제도 어느 순간부터 인간인가에 대한 도덕적, 종교적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다. 아무리 의학적 전망이 밝아도 인간의 사지를 절단하는 행위를 정당화 할 수 없으니 연구에서 파괴되는 착상前 배아는 아직 인간이 아니라는 답이 필요하다.


 ‘정의란 무엇인가?’ 적어도 의사파업에 있어서의 정의는 토론이 아닌가 한다. 각자가 생각하는 정의는 주관적일 수 있으므로 이해당사자간 토론을 거쳐 객관화시키는 작업을 해야 한다. 서로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양자 모두 국민의 호응을 받지 못한다. 

 협회에서는 토론으로 정제되지 않은 이야기를 단체의 공식의견이라 발표하고, 정부에서는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하지 않은 정책들을 발표한다면 토론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하자는 것이다. 전쟁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으며 양자는 여론을 얻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여론은 항상 정의를 중시한다. 양자가 생각하는 ‘정의란 무엇인가?’  왜(why), 무엇을 위한(for what) 정의인가?



작가의 이전글 882. 반갑다. Costa rica tarrazu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