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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이랑 Jan 14. 2022

머리카락 없이 지낼 수 있을까?

모자 쓰기의 즐거움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되면 아마 제일 먼저 하게 되는 걱정이 머리카락이지 않을까? 미모가 매우 빼어난 사람이 아닌 이상, 안타깝게도 우리 외모에서 머리카락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진단을 받고 수술  항암을 앞둔 20 중반의 나는 오심, 구토 등의 증상에 대한 예고보다 머리카락이 빠질 것이 가장  걱정거리였다.  시기엔 대부분 외모 꾸미기에 관심이 많다. 당시 나는 유방암이니 항암치료니 하는 것보다 당분간 민머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공포스러웠다. 물론 외모만이 ‘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지표가   없음을 안다. 암을 겪는 30대가 되면서 외모는  삶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조금 밀려났고, 지금은 단지 실용적인 것에 우선한 숏컷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튼 20 중반의 여성이라는 특이점이 있었으니, 당시에는 그게 제일  걱정거리였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빠질 머리카락을 붙잡을 방법은 없다. 항암치료를 시작했다면 머리카락 빠질 일을 준비해야 한다.


나는 스스로에게 적응할 시간을 주었다. 먼저 긴 머리에서 짧은 단발로 커트를 했고, 내 발길 닿는 곳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들이 보일 무렵 머리를 완전히 밀었다. 바리깡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갈 때 긴 머리가 후드득 떨어지는 것보다는 짧은 머리가 다소곳하게 떨어지는 모습이 그나마 마음이 덜 아프지 않을까? 하며 동시에 틈날 때마다 거울을 보며 민머리인 내 모습을 무수히 시뮬레이션하였다. 뒤통수가 살짝 납작한 두상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다행히 신파 없이 의연하고 편안한 쉐이빙을 마쳤다.


솔직히 나는 민머리로 지내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씻을 때 간편하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었고, 사용해야 할 드라이기며 빗, 헤어 에센스 등이 필요 없으니 생활이 보다 심플해졌다. 그리고 모자 쓰는 즐거움이 찾아왔다. 모자를 쓰면 시야가 좁아져 답답하기도 했고, 막연하게 모자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이라는 스스로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민머리가 된 이상 모자는 불용품이 아닌 필수품이다. 때문에 길을 가다가도 모자 매장이 보이면 들어가서 이것저것 써보고는 했다. 캡 모자, 빵모자, 버킷햇, 비니, 골무 모자, 벙거지 등 모자의 모양새가 어찌나 다양한지 ‘모자의 세계’란 알면 알수록 놀라웠다. 아무튼 그 다양한 모자들을 소재별, 색상별로 시도하다 보니 언제부터인가는 나에게 어울리는 모자를 큰 고민 없이 척척 골라낼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모자는 버킷햇이었고, 버킷햇에 용기를 얻은 나는 더운 여름엔 시원한 소재의 스카프를 터번처럼 멋스럽게 스타일링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들이 나는 나름 소소하게 즐거웠다. 무엇보다, 내가 민머리 암환자이지만 누구보다 예쁘고 멋진 암환자가 되리라! 라는 긍정적 의욕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시도들이었을 것이다.


2017년 항암 직후 여행 가서 찍은 사진, 스카프를 터번처럼 활용하던 시절!


나도 사실 최근 리밋 없는 생에 두 번째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기도 옆 암덩어리가 조금씩 커지는 것 같아 약을 바꿔야 할 것 같다는 소리는 미리 들었지만 이전처럼 경구 표적치료제일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재발 이후 언젠가 하게 될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 순간이 예상보다 일찍 갑자기 찾아온 것이다. 2박 3일의 간단한 검사를 위한 짧은 입원 중 들은 항암치료는 뜻밖의 시나리오였다. ‘항암치료를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하는 담당교수님의 말씀에 양말을 반쯤 신다 말고 ‘세포독성 항암치료 말씀하시는 건가요?’ 라며 다시 되물었고 그다음 질문이 ‘머리카락 빠지나요?’였다. 5년 전쯤은 정해진 횟수라도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정말 장기전이라고 생각하니 암담했다. 당장 내 앞에 예상되는 치료들이 거대한 산처럼 다가와 나를 덮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암담함에 나 스스로가 함몰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항암치료를 시작해야겠단 소리를 들은 저녁 노트북을 열고 예쁜 모자와 비니, 앞머리 가발 등을 주문했다. 누군가에게 철없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슬픔은 찰나이고 기쁨도 곧 금방 찾아온다. 암환자에게도 그냥 건강한 사람에게도. 그러니 당장 슬픈 일이 내 앞에 닥쳐왔더라도 너무 낙심하지 말자. 스스로에게 그 속상함과 슬픔을 받아들일 시간을 준 뒤 그 감정들이 소화가 되고 나면 기쁜 일을 찾아 나서면 된다. 어쩌면, 내가 찾아 나서기 전에 먼저 나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도전하는 자여, 멋진 모자를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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