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일본군에게 결정타를 날리다.
목차
1. 과달카날 섬으로 향하는 양군
2. 사보섬 해전
3. 과달카날섬 육상 전투 1차전
4. 과달카날섬 육상 전투 2차전
5. 산타크루즈 해전
6. 일본군의 마지막 과달카날 섬 상륙 작전
7. 일본군의 철수
8. 과달카날 섬 패배의 원인
1. 과달카날 섬으로 향하는 양군
과달카날 섬은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에 있는 섬입니다. 일본군은 남방 작전을 통해 동남아 지배권을 확보한 상태였고, 자신의 지배력을 오스트레일리아로 확대해서 남태평양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를 지원하고 있는 미군을 저지할 생각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자바섬 남쪽의 티모르해를 넘어서 오스트레일리아를 침공할 수도 있었지만, 지도에서 보듯이 오스트레일리아 북쪽은 일부 해안선을 제외하고, 사막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뉴기니 섬 동쪽에 위치한 뉴브리튼 섬에 있는 라바울에 해군기지와 미군기지를 세웁니다. 그리고, 뉴기니 섬 포트모르즈비를 점령할 계획을 세웁니다. 미군의 오스트레일리아 지원을 견제하기 위해 솔로몬 제도 북쪽에 위치한 부건빌 섬에도 기지를 건설하고, 1942년 7월에 부건빌 섬에서 남쪽에 위치한 과달카라 섬에 비행장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필리핀에서 도망친 더글라스 맥아더는 필리핀, 남중국해, 동인도 제도, 오스트레일리아, 솔로몬 제도를 포함하는 남서태평샹 지역을 지휘했고, 니미츠 제독은 마셜 제도, 캐롤라인 제도, 마라아나 제도를 포함한 태평양의 나머지 지역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미군 합동참모본부는 망루 작전을 계획합니다. 과달카날 섬을 장악하고, 솔로몬 제도의 부건빌 섬, 뉴브리튼 섬의 라바울에 있는 일본군 기지들을 파괴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을 지휘할 사령관은 산호해 해전에서 패배하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한 프랭크 잭 플래쳐 해군 중장이었습니다.
일본군 해군 정보부 소좌 한 명이 연합국 호출 신호를 포착해서 새로운 미군 기동 부대가 솔로몬 제도나 뉴기니를 공격할 거라는 주장을 했지만, 무시 당했습니다. 여전히 일본군은 자만심에 빠져서 미군이 당분간 공격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 사보섬 해전
1942년 8월 7일 미군 상륙 부대는 과달카날 섬 인근의 툴라기섬과 과달카날 섬을 상륙해서 일본군 기지를 점령합니다. 일본군 방어 부대는 미군 함선의 포격 때문에 기지를 비우고, 기지 뒷편의 언덕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미군 상륙 부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습니다.
라바울에 위치한 일본군 비행장에서 급하게 폭격기들이 발진했지만, 이미 늦었고, 상륙 부대에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 못했습니다. 일본군 제17군 사령관 하쿠타케 하루기치 중장은 과달카날 섬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제8함대를 조직해서 미카와 군이치 해군 중장에게 지휘를 맡깁니다.
제8함대 중순양함 5척(기함 조카이), 경순양함 2척, 구축함 1척이 솔로몬 제도로 향했습니다.
이때 일본군 제로기와 폭격기로부터 미군 상륙부대를 지키기 위해 미군 항모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의 피해가 심해서 플래처는 솔루몬 제도에서 미군 중항모를 철수하기로 합니다. 결국, 미군은 항모의 도움 없이 제8함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함선들만의 해전이 펼쳐집니다.
미군의 병력 규모는 적지 않았습니다.
사보섬 북쪽에 중순양함 3척, 구축함 2척을 배치했고, 사보섬 남쪽에 중순양함 3척, 구축함 2척에 배치했습니다.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사보섬 동쪽에 경순양함 2척, 구축함 2척을 배치했습니다.
미군의 정찰을 피해 사보섬 인근으로 이동한 일본군 제8기동함대의 공격으로 사보섬 해전이 시작했습니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은 미군 중순양함 4척(캔버라/에스토리아/퀸시/빈센스)을 침몰시키면서 한 척의 피해도 받지 않습니다. 일본군은 야간에 공격을 한 후 새벽이 오기 전에 철수합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이 일본군 중항모 4척을 침몰시키고, 야간이 되기 전에 철수를 해서 피해를 최소화한 것과 유사했습니다.
산호해 해전에서 승리하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고, 다시 사보섬 해전에서 승리한 일본은 확실히 야간 함대전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3. 과달카날섬 육상 전투 1차전
일본군은 사보섬 해전에서 승리 후 해군특수육전대 600명, 가와구치 분견대 3500명, 이차키 분견대 2000명으로 과달카날 섬을 점령할 계획을 세웁니다. 목표는 섬 북쪽 해안 지대에 건설된 핸더슨 공군 기지였습니다.
1942년 8월 16일 공군 기지 서쪽 해안에 상륙한 이차키 분견대 약 900명은 하천을 가로 질러 8월 17일 새벽에 미군을 공격했지만, 이미 상륙을 알고 있던 미군의 방어로 인해 이차기를 포함한 약 800명이 전사했습니다. 이때 미군은 경전차 5대를 동원했다고 하는데, 이를 모르고, 총검을 장착하고, 돌진했다고 하니 당시에 일본군이 얼마나 정보에 어두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군이 상륙부대만 보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곤도 해군 중장이 수송선 4척, 잠수함 6척, 수상기모함 1척, 순양함 6척으로 구성된 수송선단을 지휘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서 나구모 제독이 지휘하는 중항모 2척(즈이카쿠/쇼카쿠), 전함 2척, 중순양함 3척이 따르고 있었고, 견제 부대로 경항모 1척(류조), 중순양함 1척, 구축함 2척도 함께 이동했습니다.
미군 플래처 제독은 제61기동부대를 구성하고, 중항모 3척(엔터프라이즈/세러토가/와스프), 순양함 7척, 구축함 18척으로 대응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지나서 미군은 일본 공격 시간을 잘 못 파악해서 중항모 와스프와 호위 함대를 남쪽으로 보내는 실수를 했습니다.
일본군 경항모 류조에서 발진한 전투기 15대와 폭격기 6대는 미군 핸더슨 공군 기지를 공격했습니다. 15분만에 미군 중항모 새러토가에서 급강하 폭격기 30대와 뇌격기 8대가 류조를 공격해서 격침했습니다. 류조의 희생으로 미군 중항모 위치를 알게 된 일본군 중항모에서는 급강하 폭격기를 발진시켰고, 엔터프라이즈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미군 중항모 엔터프라이즈는 다시 진주만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군은 중항모 1척만으로 전투하기 힘들다고 판단해서 후퇴했고, 일본군은 추적하다가 결국 포기했습다. 미군 항모가 철수했으니 일본군 상륙부대는 상륙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미군은 격침되지 않는 공군 기지에서 출격한 급강하 폭격기들을 이용해서 이들을 괴롭혔습니다.
일본군 상륙 부대 중 하나인 가와구치 분견대는 핸더슨 공군기지 서쪽에 오카 대좌가 이끄는 1100명을 상륙시키고, 동쪽에 가와구치 장군이 이끄는 2200명을 상륙시켜서 내륙으로 들어가 핸더슨 공군 기지 뒤를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가와구치 장군은 미군 5000명이 핸더슨 기지를 방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미군 1만8000명의 병력이 있었고, 경전차 소대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해안 뿐만이 아니고, 공군 기지 남쪽 능선에도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해안 지대에서 밀림을 통해 우회해서 공군 기지 남쪽 능선으로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고, 능선 아래쪽에서 고지대로 공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가와구치는 공격을 시작했고, 일본군은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습니다. 사실 이 작전은 이미 계획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신립이 문경세재를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말타고 일본 조총 부대에게 돌진한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계획이었습니다.
과달카날 섬에서의 일본군은 계속 패하고 있는 와중에 미군 중항모 새러토가는 일본군 잠수함 I-26의 공격을 받고, 침몰은 면했지만, 수리를 받기 위해 작전 지역을 벗어납니다. 또한, 미군 중항모 와스프도 일본군 잠수함 I-19와 I-15의 어뢰 공격을 연달아 받고, 침몰합니다. 이제 미군이 가용할 수 있는 항모는 이곳에 배치된 지 얼마 안된 호넷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군 잠수함 부대의 전과는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이쯤에서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미군 잠수함 부대는 어디 있었을까요? 미군 잠수함은 전함들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지 않고, 일본 보급품과 자원을 나르는 상선들을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미군에 비해 일본군 보급품이 더딘 이유였습니다. 실제로 미군 잠수함은 일본 상선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었고, 일본군은 상선 호위 선단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점차 전력 차이가 벌어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1942년 9월 18일 제7해병연대가 과달카날 섬에 도착합니다. 미군 병력은 2만3000명이 되었고, 일본군이 과달카날을 점령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습니다.
4. 과달카날섬 육상 전투 2차전
1942년 10월 3일 일본군 제17군 사령부와 예하 제2사단 병력이 과달카날 섬에 있는 미군 핸더슨 공군기지 서쪽 에 위치한 타사파롱가곶에 상륙했습니다. 일본군의 계획은 이전과 동일했습니다. 밀림을 헤쳐 핸더슨 기지 후방을 야간에 기습 공격한다는 것이었죠. 아직까지 생존해 있던 가와구치는 자신이 세운 작전을 실패하는 것을 직접 봤기 때문에 반대했지만, 이미 패장인 그의 말을 듣는 이는 없었습니다.
일본군의 공격 특징은 항상 야간 기습이었습니다. 바다에서나 육지에서나 동일했습니다.
일본군은 미군 핸더슨 공군 기지에 엄청난 함포 사격을 통해 많은 피해를 입히고, 꾸준히 지상 병력과 물자를 상륙시켰습니다.
1942년 10월 23일 일본군은 밀림을 관통해서 핸더슨 기지 남쪽으로 야간 공격을 했지만, 미군 방어선을 뚫는데 실패하고, 일본군 제2사단의 최정예 부대인 제29연대가 궤멸되었습니다. 예비 연대인 제16연대도 이어서 공격에 나섰지만, 미군 방어선을 뚫을 수 없었습니다. 이로써 과달카날에서 미군 핸더슨 공군기지를 점령하기 위한 일본군 공격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5. 산타크루즈 해전
1942년 10월 25일 미군 중항모 2척(엔터프라이즈/호넷), 순양함 9척, 구축함 24척으로 구성된 제16기동부대는 과달카날 섬에서 약 644킬로미터 떨어진 산타크루즈 제도 근처에 있었습니다.
이들과 전투를 하기 위해 일본군 중항모 2척(쇼카쿠/즈이카쿠), 경항모 1척(준요), 중순양함 1척, 구축함 8척이 산타크루즈 제도로 나아갔습니다.
1942년 10월 26일 산타크루즈 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 항모에서 발진한 급강하 폭격기 22대, 뇌격기 18대, 전투기 27대가 미군 항모를 찾아 다녔고, 뒤이어 뇌격기 12개, 급강하 폭격기 20대, 전투기 16대가 발진했습니다. 미군 항모들도 급강하 폭격기, 뇌격기, 전투기 73대가 일본 항모로 나아갔습니다. 전투 결과는 일본군의 승리였습니다. 일본군은 중항모 쇼카쿠가 손상을 입었지만, 단 한 척의 배로 침몰당하지 않았고, 미군 중항모 호넷과 순양함 2척, 구축함 1척을 격침시켰습니다.
산타크루즈 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미군이 점령한 과달카날섬을 수복하지 못했고, 산타크루즈 해전에서만 92대의 비행기가 사라졌습니다. 피해가 누적됨에 따라 일본군은 항공기와 숙달된 조종사를 대체하는데 몇 개월이 소요될 것이었습니다. 미군은 소중한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6. 일본군의 마지막 과달카날 섬 상륙 작전
1942년 11월 12일 일본군 증원부대 1만2000명과 1만 톤의 보급품을 실은 11척의 수송선과 화물선이 12척의 구축함의 호위를 받으며 과달카날 섬으로 출발했습니다. 이들 호송대 앞에는 전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4척으로 이루어진 급습 전대가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2척, 구축함 8척으로 이루어진 제67.4기동전대가 유일하게 과달카날 인근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전함까지 있는 일본군의 함대 규모가 미군보다 전력상 우위에 있었지만, 미군에게는 핸더슨 공군기지에서 출격할 수 있는 항공기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미군은 지원 부대로 전함 2척, 구축함 4척으로 구성된 제64기동부대를 과달카날섬으로 파견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중항모 엔터프라이즈를 지키는 함선들을 공격에 투입한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산타크루즈 해전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어진 과달카날 앞 바다 공방전에서 일본군은 패배했습니다. 일본군은 겨우 4000명의 병사와 5톤의 보급품만을 해변에 당도시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전함 2척, 중순양함 1척, 구축함 3척, 수송선 11척이 모두 침몰당했습니다.
7. 일본군의 철수
1943년으로 넘어가면서 일본군은 더 이상 과달카날 섬을 수복할 수 있다는 기대를 접고, 철수 계획을 세웠습니다. 1943년 1월 13일부터 2월 4일까지 과달카날 섬에 있던 일본군 병력을 철수시켰습니다. 일본군은 과달카날 섬에서 약 2만5000명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반면에 미군은 약 1592명이 사망했습니다.
일본군은 미군 해군에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중항모 새러토가, 와스프, 호넷을 격침시켰고, 많은 순양함과 구축함을 침몰시켰습니다. 하지만, 미군 지원 병력, 보급품을 실어나르는 수송선에는 아무 피해도 입히지 못했습니다. 일본군도 많은 선박을 잃었고, 미국에 비해 일본의 생산 능력으로는 대체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선박의 피해도 문제였지만, 항공기와 숙련된 조종사의 손실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미군은 제로기에 대응하기 위해 성능이 강화된 헬켓 전투기를 양산해서 실전에 투입했기 때문에 공중전에서 미군의 우위는 압도적이었습니다.
8. 과달카날 섬 패배의 원인
일본군이 과달카날 섬을 탈환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달카날 섬이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생각한 일본군은 먼저 진입해서 공군 기지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지 건설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반면에 미군은 상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군 기지를 만들고, 항공기들을 배치했습니다. 만약, 일본에 먼저 공군기지를 만들고, 항공기들을 배치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 모르겠습니다. 솔로몬 제도의 부건빌 섬에 일본 해군 기지가 있었고, 뉴브리튼 섬에 라바울 기지가 있었으므로, 지원하는데 더 용이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미군은 중장비를 통해서 공군 기지를 빠르게 건설하고, 각종 물자와 병력을 빠르게 배치했습니다. 미군은 경전차 부대도 과달카날 섬에 배치했었기 때문에 총검 달고 돌진하는 일본군은 미군의 상대가 안되었습니다.
또한, 미군 잠수함대는 꾸준히 일본군 선박을 침몰시키고 있었지만, 일본 잠수함대는 일본 주력 함대와 함께 다녔기 때문에 미군을 지원하기 위한 선박들은 아무 피해도 없었습니다. 물론, 일본 잠수함대는 미군 중항모 2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일본 수송선단, 특히 자원을 일본 본토로 실어나르는 선박들의 피해가 컸습니다.
자원 능력, 산업 생산 능력의 압도적인 차이로 인해 동일한 피해를 입어도 미군의 회복력을 일본은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애초에 일본은 미국과 전면전을 할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겁만 주고, 아시아에서 손을 떼도록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타이슨이 한 말이 생각나네요. 누구나 그럴 듯한 계획은 있습니다. 쳐맞기 전에는 말이죠.
전쟁은 양측의 전반적인 산업 능력에 의해 판가름이 납니다. 경제력, 산업 생산 능력 등을 기반으로 건실한 후방 지원이 없으면 전투는 이길 수 있어도 전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일본군의 전력 보강의 어려움에 따라 미군은 맥아더 지휘하에 남태평양, 필리핀으로 진군할 계획을 세우고, 일차로 뉴기니섬과 솔로몬 제도 양쪽에서 일본군 라바울 기지를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동시에 니미츠 제독의 지휘하에 길버트 제도, 마셜 제도, 캐롤라인 제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제 일본군은 완연한 수세에 몰리고, 점령한 지역들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고민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 전에 미군의 주력이 어디로 향할까 파악하고, 한 방의 공격으로 미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혀야 했습니다.
일본이 생각한 마지막 기회인 그 곳이 어디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