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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닝레인 Dec 31. 2021

#2. 사울 레이터 : in no great hurry

사울 레이터는 아파트를 스튜디오로도 사용했다. 물건으로 가득 차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모두에 기억이 담겨 있었다. 머물고 있는 곳 외에 아파트를 하나 더 갖고 있었는데 아내가 남긴 유산이었다. 2002년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다큐멘터리를 찍던 때까지 10여년 간 한 번도 들어가보지 않았다고, 감당할 수 없을 거라 사울은 말했다. 어렵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아내의 아파트에서 그를 기다리던 것은 아름다운 추억들이었다. 영혼과 습관이 닮은 두 사람의 결합이었을까. 아내 역시 남편이 준 사소한 물건까지 간직해두고 있었다. 먼지를 쓸어내니 기억이 시간을 건너 품으로 돌아왔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니 어둠이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천천히 한 점 한 점 떨어지는 블루블랙.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여자는 10분쯤 머물러 있었다. 현관문을 열면 마치 사울의 방과 같을 것이다. 한 해 마지막 날이 될 때까지 여자는 집을 정리하지 못했다. 바빴기 때문이라 변명했지만 진짜 이유는 알고 있었다.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어질러진 잡동사니 속에 가려져 있을 기억들. 이별을 하면 이사를 하던 여자였다. 꼼꼼히 챙겨 버렸다고 생각했으나 추억의 물건은 불쑥 나타나 여자를 삼켜 버렸다. 책을 쌓아두고 옷을 여기저기 올려두고 버려야할 것까지 끌어안고 있었던 건 무의식의 반영인 지도 몰랐다. 모조리 덮어 버리면 보이지 않겠지, 잊을 수 있겠지, 끝나겠지 생각했던 걸까. 오산이었다. 정말로 버리고 싶은 것은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눈을 감으면 바람이 느껴졌다. 고요히 누워 잠들었을 때조차 그에게선 맑은 공기가 불어왔다. 선선한 초록 바람이었다. 


십년 만에 아내가 남긴 아파트 문을 열었을 때 사울은 뜻밖에도 고마운 추억을 만났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낡은 의자에 몸을 묻고 지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사람을 죽이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 더 잘 했어야 했어. 내 잘못이야. 남은 생 내내 죄책감을 느낄 거야." 


여자는 컴퓨터 앞에 앉아 아직 같이 있던 날의 남자 사진을 열어보았고 일어나 책상 위에 위태롭게 쌓인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봉인해두었던 시간을 기억을 하나씩 꺼내보기로 한다. 손에 쥐는 순간 슬픔이구나 싶더라도 버리지 않기로 한다. 눈물이 나면 살아 있구나 웃게 되겠다. 울지도 못한 채 긴 시간을 견뎠다. 정리하고 나서는 글을 써볼 생각이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만큼 마음이 흘러간다면 고맙겠다. 얼어붙은 강처럼 그녀의 내면은 너무 오래 검고 차가웠다. "남은 생 내내 죄책감을 느낄 거야" 죽어버린 사랑에 대하여 후회를 적게 될 지 원망으로 흐를지 알 수 없으나 상관없겠다. 흐르고 살아 있고 그러다 어느 바다에 가서 닿는 꿈만 꾸겠다. 다시는 얼지 않을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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