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빨간색, 어릴 적 나는 빨간색을 좋아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다. 그저 파워레인저의 대장은 언제나 레드였고, 레드는 늘 열정 넘치는 멋진 리더였으니까. 어릴 적 모든 아이들이 그랬듯 나도 레드처럼 주인공이 되고 싶었으니까, 빨간색을 좋아했을 뿐이다.
나는 항상 주인공이 되고 싶었고, 대장이 되고 싶었고, 열정 넘치는 파워레인저 레드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옷장에는 빨간 옷들로 가득했고, 빨강은 자연스럽게 나의 상징 같은 색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색이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올라갈 때쯤이었을까. 나는 내가 그렇게 열정적이지도, 강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도 아니라는 걸 서서히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어디에서나 빛이 나고 열정적인 레드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을 보며 깨달았다. 아... 나는 레드가 아니구나.... 레드가 될 수 없구나....
그렇다고 그저 그런 조연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아직 나는 너무 어렸고 나에게는 아직 관심이 필요했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보라색
뜨거운 열정과 강한 리더십이 부족하다면, 대신 보라색처럼 특이함과 유니크함으로 나의 존재감을 표출하자. 그렇게 보라색은 나의 새로운 색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보라색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드물었다. 누군가 보라색을 좋아한다면 "특이하다" , "이상하다"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러한 점 때문에 보라색을 좋아했다. 그러한 점이 날 특별하게 보이게 만들고, 날 주목하게 만드니까. 그런 식으로라도 관심을 받고 싶었다.
일본잡지를 보며 옷을 고르고, 바지통 줄여 입던 친구들 사이에서 통을 넓히고, 수업시간에는 엉뚱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평범했던 나에게는 "보라색"은 "빨간색"보다 더욱 힘들었다. 개성은 참고할 만한 레퍼런스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관심을 받을 수 있던 것이었다.
결국 나는 슬픈 현실을 마주하며 또다시 색을 잃었다. 나는 보라색도 아니었던 거다. 다른 색을 흉내 내고, 연기도 해봤지만, 그럴수록 나는 열정도 개성도 없는 평범함 조연임을 뿐임을 더 깊이 깨닫게 될 뿐이었다.
무채색
서른이 넘은 지금, 나는 빛이 바래 무채색이 되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무채색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엔 관심과 주목을 받고 싶어 발버둥 쳤지만, 지금은 그냥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그냥 무채색처럼, 있어도 없어도 티가나지 않는 배경처럼. 그래서일까 언제나 색색의 옷들로 가득하던 내 옷장은 이제는 흑백 TV 화면처럼 변해버렸다.
물론 무채색이 있기에 그림에 강약이 생기고, 지루하지 않다는 말들을 한다. 하지만 솔직히 크게 와닿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그래도 리더는 레드고, 개성은 보라색이니까. 그러나 이제는 크게 상관없다. 배경의 일부로 사는 인생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그래도 아직도 가끔은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떄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빨간색 팬티를 입고 출근길에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