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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막의 연금술사 Oct 21. 2022

기내 응급 상황 이야기

비행 중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심한 난기류, 손님이 원하시는 메뉴가 다 떨어지는 상황, 술에 취한 손님 응대, 기타 이러저러한 상황으로 인한 손님의 컴플레인 등... 비행 중에는 예상치 못한 여러 가지 상황들이 발생하기 마련이지만 누군가 나에게 비행 중 가장 마주치기 싫은 순간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메디컬 케이스’를 꼽을 것 같다.


크루들 사이에서 일명 ‘메디컬 케이스’라고 불리는 ‘기내 환자 발생 상황’은 두통, 소화불량, 비행기 멀미 등 비교적 가벼운 증상에서부터 닥터 페이징(=기내방송으로 기내에 있는 의사나 간호사 등 의료진을 찾는 것)을 하거나 비상착륙을 고려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까지 매우 다양한데, 가벼운 증상도 언제든지 응급상황으로 변할 수 있기에 크루들은 아주 사소한 메디컬 케이스라도 항상 주의를 기울인다.




승무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도 메디컬 케이스를 처음 겪게 되었다. 그날 비행기 뒤쪽의 부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부사무장님께서 내 이름을 크게 부르셨다. 나는 “네에~” 하고 대답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갤리를 나섰는데, 순간 내 눈앞에 보인 건 쓰러져있는 손님과 손님을 부축하고 있는 부사무장님! 경험 많으신 부사무장님이 이것저것 지시해 주셔서 금방 응급처치를 할 수 있었지만, 트레이닝에서만 듣던 일들이 실제로 기내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또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무튼 그날을 시작으로 나는 비행을 하면서 많은 메디컬 케이스를 접하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되었던 실신은 비롯(생각보다 기내에서 흔히 일어난다), 비행기 멀미로 인한 탈수, 저혈당, 화상, 음식 알레르기 반응, 신부전증, 과호흡, 허리 디스크 발생 등등등... 종류도 정말 다양하다.




이렇게 비행 중 응급상황이 발생할 경우, 초기 조치를 해야 하는 것은 승무원이기에, 승무원들은 신입사원 교육 기간에 응급처치 관련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재교육을 받고, 비행 전 브리핑에서 간단히 응급처치 관련 질문을 함으로써 관련 내용을 숙지하고 있을 수 있도록 한다. 


응급처치 교육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승무원 교육과정 중 개인적으로 가장 고생한 부분은 바로 이 First Aid 과목이었다. 트레이닝에서는 기내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두통, 소화불량, 속 쓰림 등의 증상과 약의 종류 및 계열을 배우는 것을 시작으로 뇌출혈, 심정지, 맹장염, 간질, 과호흡, 심부정맥 혈전증, 출산 등 드물지만 발생 가능한 상황들과 그에 따른 응급처치를 교육받는다. 또한 심폐소생술, 심장 제세동기, 기내에 실린 산소통 및 구급상자들의 사용법 등을 교육받는데, 두통엔 게X린, 설사엔 정X환, 속 쓰림엔 겔X스 처럼 전형적인 한국 약 만을 알고 지낸 나에게 영어로 된 온갖 약들과 그 약의 계열, 효능을 비롯 온갖 의학 용어를 영어로 공부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실무에서 깨달은 복병이 있었으니... 그것은 세상에는 정말 많은 의료용어가 존재하고, 지병 및 수술 이력을 가진 사람이 정말 정말 많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손님이 두통으로 인해 진통제를 요청하셨을 경우, 그것이 단지 음주나 비행기 멀미, 혹은 소화불량으로 인한 두통인지 아니면 심각한 의료 상황의 전조증상인지 승무원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약을 드리기 전에 손님들에게 몇 가지 질문들을 하게 되는데, 지병을 갖고 있거나, 최근에 수술을 하신 분들의 경우 상황이 조금 더 복잡해진다.


나의 경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에,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병명이나 수술 이력의 경우는 손님에게 최대한 자세히 물어서 적어두고, 프로시져에 따라 슈퍼바이저에게 반드시 확인을 받지만, 새로운 의료용어를 들을 때마다 흠칫흠칫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만약 손님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손님의 모국어를 확인한 후, 이를 사용할 줄 아는 승객을 찾아 통역을 부탁한다. 우리 항공사는 크루들의 국적이 정말 다양한데, 이런 경우에 그 장점이 빛을 발휘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몇 년 전에 내가 겪었던 소소한 에피소드 하나.

손님께서 머리가 아프다며 진통제를 요청하시길래, 약을 드리기 전에 확인해야 하는 사항 등을 묻기 시작했는데, 나의 질문이 두 개가 넘어가자 손님이 버럭 화를 내시더니 하시는 말.

“아니 이 항공사가 얼마나 큰 항공사인데, 이런 진통제 한 알에 이렇게 쩨쩨하게 구는 거야??!!!!”


우리는 절대 진통제 한 알이 아까워서 이러는 것이 아니다. 손님의 현 상태, 음주, 임신 여부 및 지병 등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승객 본인을 위한 일이고, 더 크게 보자면 탑승하신 모든 승객분들을 위한 것이니, 혹시 기내에서 약을 받으셔야 되는 상황이 온다면 좋은 마음으로 협조해 주시길.

잦은 두통이나 소화불량 및 지병으로 인하여 복용하는 약이 있는 경우, 소량은 기내에 가지고 타셔도 되니 잊지 말고 챙겨 오시길 바란다.


오늘 하루도 전 세계의 하늘을 수놓을 많은 비행기들의 메디컬 케이스 없는 평안한 비행을 기원하며...



*이전 이야기* https://brunch.co.kr/@a7lchemist/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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