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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룬 Jan 05. 2022

늦게 배운 커피에 지갑 새는 줄 모릅니다 上

'반커피파'가 '커피파'로 변한 순간

 창문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무시무시하다. 집에 꽁꽁 틀어박혀 있고 싶은 날씨다.

 그렇지만 나는 날씨가 무서워 집에 숨어 있는 게 아니다. 나의 방공호에서 파스텔 배경에 벌 캐릭터들이 잔뜩 박힌 보들보들한 파자마를 입고 겨울을 유린하는 중이다.

 호로록,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나한텐 하나도 안 통해. 아이 참 따숩다, 따수워!”

  매서운 바람 소리를 향해 괜스레 맞시비를 걸어본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든다.

 ‘근데 언제부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더라?’

 아 맞다! 그때 그 아이 러브 뉴욕 커피.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커피를 입에도 대지 않았다. 내 입엔 맛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성인이 되고 나서도 몇 년이나 ‘반커피단’이었다. 다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때 나는 늘 다른 차 종류를 주문했다. 그래서 지금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놀라는 일이 간혹 있다.

“뭐야, 너 이제 커피 마셔? 언제는 쓴 물이라며!”

 커피 맛에 다양한 혹평을 남기며 지은 죄가 많은 나로서는 민망함에 할 말이 없다. 스리슬쩍 넘어간다.

 “맞아, 쓴 물 참 맛있지~”

 이렇게 능청을 떨면 오히려 궁금해한다. 언제부터, 왜 마셨는지. 흠, 커피를 마시게 된 계기는 생각보다 굉장히 소소하고 그때의 이유도 단순하다. 맛있었으니까!


 4, 5년 전이었나? 날이 참 쌀쌀한 11월 즈음 도쿄에서 대학원 설명회가 있었다. 설명회에 입장하기 전, 간단하게나마 식사를 하고 참석하려고 근처 음식점을 알아봐 두었다. 마침 가까운 곳에 일본 음식 만화에도 등장한 적 있는 카페가 있었다. 칠리 빈 토스트가 유명한 곳이다. 내가 주문한 토스트와 컵에 담긴 삶은 달걀, 오렌지 주스에 커피까지 트레이에 함께 담겨 나왔다. 메뉴판을 다시 살펴보니 모닝 세트에 커피가 포함되어 있다고 쓰여 있다.

 ‘음, 필요 없는데....’

 커피가 담긴 검은색 머그잔에는 'I(하트)NY'라고 쓰여 있었다.

 ‘촌스러워. 도쿄 한복판에서 아이 러브 뉴욕이 뭐람.’


 그런데 왜 그날따라 괜히 한 모금 마시고 싶어졌을까? 다들 조용히 홀로 식사하며 토스트와 커피를 번갈아 먹고 마시는 분위기에 함께 섞이고 싶었나, 아니면 토스트가 퍽퍽했나, 아니면 입도 대지 않으면 사장님께 죄송하다고 생각했나? 이 부분만 기억이 흐릿하다. 어쨌거나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왜 맛있지.


 사실 커피를 마셔본 경험은 이전에도 몇 번이나 있었다. 다만 몇 번을 마셔도 맛없다고 느꼈을 뿐이다. 나에게는 한약과 별반 다를 것 없던 검은 액체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이렇게 맛있게 느껴진다니? 심지어 세트에 달려 나오는 무료 커피가! 충격적이다. (후에 알아보니 ‘OBSCURA COFFEE ROASTERS’라는 로스터리의 원두를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였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용히 한약을 마시는 철인 집단으로 보이던 손님들이, 이제는 커피를 음미하며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순수하고 멋진 사람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그 카페의 일원이 되어 카페 내부 인테리어를 구경도 하고 바깥의 쌀쌀한 날씨를 바라도 보고 가끔 멍도 때리며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기도 하며 커피를 즐겼다.


 '이 맛이구나!'

 커피는 맛과 향뿐만 아니라 주변 공기, 그 모든 냄새를 포함한 음식이구나.

 이토록 복잡한 음식이었다니.

 그래서 내가 커피 맛을 이해하기까지 오래 걸렸던 걸까?

 남들은 이 맛있는 걸 일찍이부터 알고 있었다니! 나는 몇 년을 손해본 것인가!


 커피라는 새로운 분야에 발을 들였다는 짜릿함에 입술이 제멋대로 씰룩댔다. 또 이제 막 눈을 뜬 듯한 해방감이 온몸에 가득했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까지.

‘오늘 설명회에서도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커피 신고식이랄까. 흥분감과 평온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요상한 감각에 심취해 있다가 현실로 빠져나왔다. 휴대폰 화면 속 시계.

 “아, 지각이다.”


 착각했다. 주변 손님과 나는 다르다. 그들은 여유를 부렸고 나는 늦장을 부린 것이다. 아쉽다고 생각할 새도 없이 토스트로 가득 찬 배를 부여잡고 설명회장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다음에는 나도 커피를 앞에 두고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다시 돌아오리다.

 나는 그 커피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커피를 싫어해’, ‘커피는 내 취향이 아닌가 봐’ 이렇게 생각해왔지만, 그것은 오답이고 속단이었다.  그동안 내 입에서 나왔던 커피를 맛없다고 모욕하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저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만나지 못했을 뿐인데, 그저 커피를 즐기는 방법을 몰랐을 뿐인데 실언을 했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무릎을 열 번 정도는 꿇고 바로 ‘커피단’이 되었다.


 만약 그날 그 카페에서 커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서빙된 커피를 한 입도 마시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반커피파’로 살고 있었을까? 상상하기 싫은 평행세계다. 나는 이렇게 커피를 향유할 줄 아는 지금이 좋다.




 후에 대학원에 합격했지만 그 카페를 다시 찾아간 일은 없다. 다짐이나 추억이 흐려져서가 아니다. 그 카페는 여전히 나에게 특별하다. 나를 커피의 세계로 훅 잡아끌어준 가게를 어찌 잊으랴. 어찌 보면 내 인생 커피다. 머그잔의 ‘아이 러브 뉴욕’은 내 마음속에 ‘아이 러브 커피’라고 잘 새겨져 있다. 그 카페는 내가 다시 ‘여행객’으로서 일본에 방문하게 되면 꼭 다시 들르기로 정해두었다.

 가보고 싶은 카페, 궁금한 커피가 늘수록 내 지갑은 힘들지만… 행복합니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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