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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 Apr 14. 2023

이젠 정말 그만 명랑할 때가 되었다

이태준, 토끼 이야기


- 명랑하라, 건설하라, 시대는 확성기로 외친다. 현은 얼떨떨하여 정신을 수습할 수 없는데다, 며칠 저녁째 술이 취해 돌아왔던 것이다.



- 현은, 듣기 싫어 소리를 치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 썼으나, 또 반동적으로 이 날도, 그 이튿날도 고주가 되어 들어왔으나, 사실 아내의 말이 찔리기도 하였거니와 저 혼자 취한다고 세상이 따라 취하는 것도 아니요, 저 혼자나마도 언제까지나 취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태준의 토끼 이야기.

자유가 억압 당하던 일제 시대, 무기력한 지식인에 대한 단편 소설이다.

글을 쓰는 소설가 현은 내제하는 '예술적 열망'과 생계를 위해 기고 소설을 써야만 하는 현실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신문사에 남을 위한 글을 써 내는 대신 나의 글을 써보리라 다짐한 그는 (마침 총독부의 감시로 조선의 신문사들이 곳곳에서 문을 닫고 있기도 하였고) 생계를 위하여 벌이가 꽤나 쏠쏠하다는 '토끼치기' 에 뛰어들게 되지만

토끼를 키우는 데 드는 값이 더 나와 영 낭패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는 돈을 벌기 위해 토끼를 잡아 가죽을 벗기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당혹스럽기만 하다.



명랑하라, 건설하라, 시대는 확성기로 외친다는 구절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명랑이라는 두 글자.

명랑하라, 명랑하라.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하여라. 유쾌하고 활발하여라.



그러나 90년대 초 조선에게 명랑이란 그저 모욕이다. 가당키나 한 명랑인가.



소래섭의 저서인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오래 전에 읽어 제대로 기억은 안나지만서도 천천히 되짚어보자면

그래, 기형적인 조선인들의 명랑, 그 출처를 밝히는 책이었던 것으로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책에서 다룬 것처럼 불온분자를 하루가 멀다하고 거리로 끄집어 내어 복날 개 잡듯 패 버리던 시대에도 어떻게 조선인들이 명랑할 수 있었는가를 떠올리면 역시 일제의 감정 정치가 빠질 수 없겠다.

1930년대, 문화 통치가 본격화 되던 시기, 총독부는 조선을 식민지 체제에 맞게 개편하고 조선인들의 신체와 두뇌를 통제하려 했던 '명랑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토끼 이야기' 의 주인공 현 역시 명랑화 작업의 그늘 아래 놓인 권태로운 지식인이다.

시대에 맞서 저항하기 보단 그저 당장의 생계가 위태롭고 다만 글을 좀 써보고 싶을 뿐인.



그렇지만 현이 과연 1930년 경성에만 존재하나?

시대를 타고 흐르는 무기력의 물줄기란 무서운 것이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징검다리가 된 지는 이미 한참이니 더 보탤 말도 없겠다만

그래도 여전히 지식인으로서 살아가보겠다 다짐한 이들이 그 건물 방 한켠에 조르르 모여 있는 작금의 시대가 어쩐지 계속 우습기만 한 것은 착각이 아닐테다.



1930년에는 허울 좋은 핑계라도 있었다. 도무지 나설 수 없었대도 탓으로 이어져선 안됐다. 목소리 낸 자의 용기를 숨 죽인 자를 비난할 근거로 써서는 안된다. 우리 대부분은 그럴 자격조차 없다.

그렇지만 2023년은 도대체가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겠다.

내 머리를 겨누는 방아쇠가 있나, 내 등을 노리는 칼이 있나.

표현의 자유는 더 해졌지만 의지는 도무지 발휘될 작정이 없어뵌다.



이를 부끄럽게 여기는 법도, 고개 숙이는 법도 모두 잊어버린 우리들.

누가 먼저 가죽이 벗겨져 핏물이 죽죽 베어나오는 토끼를 들이밀 것인가.



각성의 기회는 시대를 향해 성큼 성큼 다가오고 있는데

무기력한 우리는 한 치 앞을 보지 못한다.


이젠 정말 그만 명랑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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