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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란 Feb 25. 2022

폴란드 결혼식 하기 : 0. 두 번 청혼받았다.

깎아지른듯한 절벽 위에서, 5분 간격으로 두 번 받았다.

나의 (국제) 결혼 이야기를 하자니 일단 왜 결혼을 해야 한다고 느꼈는지부터 좀 적어야겠다. 간접적인 계기는 여럿이지만 서론이 너무 길면 재미없으니 직접적인 계기가 된 프러포즈부터 적겠다.


2021년 9월, 나와 남자 친구는 노르웨이 여행 중에 있었다.

교제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 세계가 코로나 대 유행 사태에 빠졌고, 이후 현재 거주하는 폴란드 이외의 해외 출입을 하지 않았기에 처음으로 가는 해외여행이었다.

공항에 내리고, 렌터카를 빌리고, 첫날 오후부터 노르웨이 3대 피오르드 중 하나라는 프레이케스톨렌(Preikestolen) 산을 올라 정상에 텐트를 깔고 노숙을 한 밤, 체력이 부족한 나는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숙면을 취했다.


..

..

..



'띠리릭 띠리릭' 요란히 울리는 남자 친구 휴대전화의 모닝콜에 나는 휴가일 땐 알람 좀 끄고 살라며 남자 친구 등짝을 세게 후려갈겼고, 깨어난 남자 친구는 해돋이 볼 시간이라며 나를 깨웠다.

해돋이는 새해 아침 정동진서만 보는 줄 알았는데 폴란드 감성에도 해돋이를 보는 건가? 하고 눈을 떠 텐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보니, 밖은 온통 컴컴했다.


당일 아침 7시 프레케스톨렌 정상에서의 사진, 자욱한 안개 너머로 자세히 보면 노르웨이 뤼세피오르드(Lysefjord)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다. 안개 너무 찐했다..


어제의 등산으로 삭신이 다 쑤시지만 에구, 비싼 돈 주고 노르웨이까지 왔는데 노르웨이 해라도 좀 보자 하고 텐트를 걷고 물건을 주섬주섬 남자 친구 배낭 안에 넣는데, 배낭 안에서 왠 딱딱한 것이 잡혔다.

이 칠칠맞지 못한 양반이 신용카드를 이런 빠지기 쉬운 앞주머니에 넣다니, 단단히 잘못되었구나! 하고 꺼냈는데, 그건...


다이아몬드 보증서였다.


순간 수백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흘렀다.


헐 얘가 나한테 청혼하려나 봐.

그래, 처음으로 떠나는 해외여행이니 그럴 만두 하지. 얘는 항상 나랑 결혼하고 싶어 했잖아.

깜짝 프러포즈 같은 걸 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냥 그러게 놔두자. 지가 생각한 게 있겠지.

근데 어디서 하려 그러나? 여행 마지막 날 레스토랑이라도 예약했을까?

북유럽에 맛집이 있나?

흠흠 어찌 됐건 모른 척하고 있자. 여하튼 기대되는군 히히히히히힛


요 환상은 오분 뒤에 깨졌다.


텐트를 걷고 안갯속을 배회하며 애써 나오지도 않는 해를 찾던 남자 친구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을 때, 나는 육성으로 소리쳤다.


(앞에 뭔가 길게 말하셨으나 내가 너무 당황해서 기억나지 않음)"Wyjdziesz za mnie?"(나와 결혼해줄래?)

"Coooooooo? Naprawdę? Teraz?(뭐ㅓㅓㅓㅓㅓㅓㅓ? 진짜로? 지금?)"


대답이야 당연히 "Tak"(네)로 정해져 있었으니까 별로 고민할 것은 없었지만, 이렇게 다소 황당(?)한 프러포즈가 끝나고, 내가 반지를 받아서 손에 끼웠다.


어떻게든 풍경과 같이 찍고 싶어서 애쓴(?) 인증숏.


잠시 뒤, 좀 긴장이 풀렸는지 남자 친구가 주절주절 말을 해온다.


"사실은 멋진 해돋이를 보면서 너에게 청혼하고 싶었어. 그런데 날씨가 안 따라 주네..."

"뭐 네가 하나님도 아니고 날씨를 맘대로 어쩌겠어? 그럴 수도 있지.."


그때였다. 이게 무슨 주문도 아니고, 우리가 저 말을 하자마자 갑자기 바다에 자욱하던 안개가 개이기 시작했다.




흐리긴 하지만 피오르드가 보인다, 멋지다!

우리 둘은 그 광경을 멍 때리고 쳐다봤다.


정말 멋지다. 자연의 신비다... 하지만 감탄보다 내 머릿속에 먼저 드는 생각은 이거였다.


"프러포즈 오분만 더 기다렸다 하지 그랬어..."

"그러게... 다시 할까?"

"응 좀 다시 해봐."

(주섬주섬 무릎을 꿇는다)


이렇게 남자 친구는 두 번 내게 청혼했다. 두 번째 대답도 물론 첫 번째 대답과 같았다 :)


이후 우리는 공식적으로 약혼한 사이가 되었고, 22년 7월 날짜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변수도 많고, 폴란드-한국이라는 우리의 국적 때문에 다른 커플들과는 준비하는 과정이 다소 다를 수도 있어, 처음으로 기록매체를 통해 기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읽다 보면 손발이 오그라들 수도 있지만, 내 인생의 중요한 순간이니까.

계속 꾸준히 기록하여 결혼식의 전 과정을, 더 나아가서 다른 나의 생활상을 담아낼 수 있도록 노력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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