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
들어가며
학교에서 살인마가 문을 잠그고 활로 사람들을 쏘아 살해하는 사태가 생겨난다.
가해자도 청소년, 피해자도 청소년.
이에 세상은 크게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미성년자가 그렇게 끔찍한 짓을 했을까.
그 이유에 대해 보통 연쇄살인마를 보고 수많은 범죄심리 프로그램과 인터넷 곳곳에서 논할 때 그러하듯, 이 사건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말한다.
‘대체 저 애의 부모는 애를 어떻게 키운 거야?’
영화, <케빈에 대하여>는 그 의문을 영화적으로 풀어내었다. 즉,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활로 사람들을 쏜 소년 케빈이 아니라, 그가 소년원에 들어간 후 세간의 질타를 받게 되는 어머니 에바에 대한 이야기이다.
에바도 앞의 의문을 똑같이 품고 있다. ‘나는 어디에서부터 잘못한 걸까?’
에바의 이 의문은 태생부터 시작해, 에바와 케빈의 관계를 짚어나가며 답변하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에바가 아닌 관객을 향한 감독의 반문으로 끝나게 된다.
우선 나는 이 영화적 질문과 감정을 중심으로 다루는 붉은색 상징들을 중심으로 사건이 일어난 원인들과 그에 답할 수 있는 영화적 질문을 정리하고, 이미지 착안점을 정리해 그림으로 대답하는 과정을 2021년 12월의 팬딩의 이미지 착안 수업에서 강의했다.
1차로 착안점을 정리하고 강의 내용을 다듬은 후, 말미에 다른 사람들의 해석이나 반응들을 찾아봤는데, 많은 게시글에서 영화 속 주체인 에바가 아닌 케빈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케빈을 잘못된 양육방식의 산물로 묘사한 것을 발견했다. 물론 그러한 해석 전개 또한 일리 있기는 했지만, 과연 이 영화를 그렇게만 바라보는 것이 맞을까?
내가 느끼기엔, 이 영화는 그보다는 다층적인 질문을 품고 있었다.
또한, 화자인 에바의 감정을 대변하는 편이 이 영화의 기승전결을 더 잘 말해볼 수 있겠다 싶어 이번 글까지 작성하게 되었다.
우선 강의를 마친 후 내가 이미지로 연결시켰던 지점들을 풀어내, 다시 이 사건에 에바가 제공한 원인과 영화적 질문으로 나누어 아래와 같은 목차로 정리해보았다.
*내용 전반에 스포일러가 다량 포함되어있습니다*
1. 유전적 원인
2. 치환된 죄의식
3. 후천적 원인
4. 영화적 질문
5. 질문에 이미지로 답하기
우선 유전적 요소부터 보자. 다시 이야기하지만 이 영화는 에바가 케빈에 대하여 생각하는 영화이다. 이 챕터는 에바가 ‘태어날 때부터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살인자가 될 만한 기질을 내가 물려준 것은 아닐까?’하고 고민하는 장면들을 모은 챕터라고도 설명할 수 있겠다.
선천적/유전적 기질과 후천적 양육방식에서 생기는 기질 중 어떤 것이 가장 우세하게 성격 형성의 원인이 되는지는 아직까지 왈가왈부가 많은데, 이 챕터에서는 우선 유전적 기질에 대한 연계점들을 보여준다.
우선 영화 시작 즈음에 에바는 에바가 검은 옷을 입고 고통스러운 듯 물에 고개를 흔드는 장면부터 보자.
아들이 사람을 죽였다. 다니던 학교의 문을 자물쇠로 잠가 계획된 살인을 저지르고, 그 과정에서 에바의 남편과 딸까지 죽였다.
그 사실을 홀로 되새기는 에바의 머릿속에는 과거의 장면과 가족들의 모습, 현재가 뒤섞였고, 그에 괴로운 듯 세면대에 얼굴을 휘젓는데, 이건 영화 전체를 정의하는 케빈과 에바의 연계를 암시하는 장면이다.
일단 여기서 물에 섞이듯이 에바가 고개를 흔들고, 고개를 들기 전 잠시 케빈의 모습이 겹쳐지는데, 흔들림과 색을 활용해 둘의 동일성을 보여준다. 아주 초반의 이 시퀀스로 영화 전반의 흐름이 나왔다.
모자지간의 부정적인 연계와 감정선이 나올 것이다-라는 복선인 셈. 이 직후 나오는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자연스럽게 <케빈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속으로 읊조려지지 않나.
이 직후의 장면에서는, 딸과 아버지가 흰 옷을 입고 춤추는 장면이 나온다.
연계되어있지만 분리되어 있던 에바와 케빈과는 달리 이 둘은 서로를 다정하게 마주 보고 있다.
상대적으로 건강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안내이자, 무엇보다 아버지와 딸은 이 부정적 연계에 대한 이야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암시.
물론 다른 장면으로도 해석해볼 수 있겠다.
케빈이 사람들을 활로 쏘아 죽이는 과정에서 동생과 아버지도 살해했기 때문에, 에바가 천국에 있는 사람들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는 장면으로도 연결 지어볼 수 있다.
또 여기서 한 번 짚자면, 영화는 보통 처음과 끝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안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영화적 목차나 안내 같은 셈. 따라서 지금 에바의 전반적인 심리구조를 짐작해봐도 무방하다.
일단 에바의 어두운 색, 즉 예민하고 부정적인 기질이 케빈에게 어느 정도 유전되었다는 것이 나왔는데, 여기서 에바는 일종의 섬뜩함을 느꼈을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고 자신의 책임이 얼마나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하게 된다. 사실 에바가 남편에 비해 무언가 더 많이 했고 말고 문제보다는 그 기질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도 책임감이나 수치심을 느꼈을 거다.
그 유전에 대한 시퀀스가 두 개 더 있다.
에바는 케빈이 수감된 감옥으로 면회를 간다. 자신의 남편과 딸까지 죽인 아들에게 면회를 가는 심정은 어땠을까. 둘 사이는 서먹했고, 케빈은 지루했는지 손톱을 물어뜯어 책상에 하나씩 늘어놓는다. 근데 손톱을 놓는 방식이 좀 특이하다.
후에 이 장면은 이후에 나오는 에바가 요리에서 깨진 달걀 껍데기를 빼서 접시에 늘어놓는 장면과도 이어진다.
방식이 상당히 유사하지 않나.
케빈은 어릴 때부터 손톱 물어뜯는 버릇을 보이곤 했는데, 이는 호기심이나 지루함, 초조함을 느낄 때 주로 나오는 신경증적인 증세를 나타낼 때, 영화적으로도 많이 표현되는 장치. 이 장면을 통해 그 기질이 에바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영화상으로 맨 처음에 나왔던 장면으로도 돌아가 보자. 영화의 시작이자 에바가 토마토 축제에서 헹가래를 받는 장면인데, 자유나 환희의 정서가 느껴지지 않나. 팔을 벌리고 사회적으로 용인된 폭력의 축제, 토마토 축제에서 즐거워하는 에바. 이때 사람들이 강당에서 도망치는 소리와 비난하는 소리가 함께 울려 퍼진다.
에바는 영화 내내 여행과 자유를 사랑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다. 이 장면도 가장 첫 번째 장면이자 그 캐릭터성을 보여주는 장면이자,
섬뜩하게도 마지막에 케빈이 강당에서 활을 쏠 때의 장면과 겹쳐지는 장면이다.
마찬가지로, 얽매이진 않지만, 사회적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 또한 에바에게서 나왔을 수도 있으며, 케빈의 경우 그 방향이 폭력성으로 드러났다는 점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이 사건에 대해 외부에서는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이 미묘한 기질의 동질성과 그에서 오는 섬뜩함을 굳이 에바가 말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당연히 에바의 몫으로 치환한다.
케빈은 감옥에 가 있으니, 이를 길렀던 에바에게 비난의 화살이 모두 돌아오게 되고, 에바는 케빈을 낳고 길렀던 사람으로서 케빈과 피해자 유족들의 분노와 상실을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에바는 이에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잠시만 이 상황 자체에 집중해보자.
오래간만에 좋은 일이 생겨 웃는 에바에게 피해자의 가족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다가와 비아냥거리더니 뺨을 때린다.
아들이 저지른 폭력이 에바에게도 폭력적인 방식으로, 즉 꼬리표로 돌아오는 것.
이러한 외부적인 충격은 영화 내내 에바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의심, 이미 발견했던 의심들과 맞부딪힌다.
따라서 폭력에 놀란 행인에게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에바 자신도 스스로에게 많은 화살을 돌리고, 책임과 수치를 느끼고 있다는 증거.
이 내외부적인 요소는 에바에게 어떤 심리적인 증상들이 일으킨다.
케빈이 저지른 짓 탓에 이전 직장에서 잘린 것으로 보이는 에바는 훨씬 좋지 못한 직장에 면접을 보러 가는데, 거기서 에바는 자신의 머리카락에 붉은 페인트가 묻어있는 것을 보고 불안해한다.
여기서 합격하고 아까 오래간만에 즐거워하다가 뺨을 맞은 거다.
또, 외출을 했다가 집으로 돌아온 에바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에 똑같은 색상의 페인트가 묻은 것을 발견하기도 했다.
타인의 시선에 대해 불안해한다는 물증으로도 볼 수 있겠다. 무엇보다 색을 섬세하게 이용해 폭력의 꼬리표로 아주 훌륭하게 담아낸 장면이다. 이런 방식으로 붉은색 꼬리표가 두 번에 거쳐 등장하는데, 그에 그치지 않는다.
이 불안에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붉은색 페인트로 에바의 집을 테러한다. 에바의 터전 자체가 붉은 꼬리표로, 폭력으로 물든 것.
앞에서 취직한 새 직장의 할로윈 파티에서도 비난을 겪고 돌아오는 길, 에바는 차를 타고 가면을 쓴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공포에 질린다.
어지러운 상황 중에서 와중에 앞서 본, 집에 쏟겠다고 표현한 꼬리표도 보인다. 집에 도착해서는 그 아이들이 캔디를 달라고 창문을 두드리는 상황에서 공황 증세를 느낀다.
이 장면이 과거에 에바가 케빈에게 ‘너 때문에 자유를 잃었다’며 소리를 지르는 장면으로 이어지는데, 케빈을 기르며 고통스러웠던 장면이나, 에바가 사건으로 인해 비난을 받은 것에 대해 정신적 피해가 심각하다는 표현이자, 트라우마와 죄책감이 뒤섞인 장면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에바에게 케빈은 어떤 의미일까? 케빈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며 그를 길렀던 걸까?
여기서 한 번 이야기해보자.
이번에는 에바의 양육방식과 케빈과의 관계, 그리고 에바가 잘 알지 못했을 케빈의 증세 등을 한 번 짐작해볼 수 있겠다.
우선 다시 케빈을 가지던 시점으로 돌아가서, 에바의 성격을 한번 짚어보자.
붉은색은 폭력이자, 꼬리표이기도 했지만 에바가 느낀 자유에도 등장한다. 표정을 보면 알겠지만 애초에 자유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사랑에 심취해 남편을 만나기도 했다. 좀 경솔하기도 하지만 묶여있지 않을 때 환희에 가득하고, 또 자유로워보이는 사람이다.
근데 케빈을 가진 시점 이후로 이런 표정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그래도 막상 태어난 케빈을 안아 드는 에바의 모습은 굉장히 기뻐 보이는데,
사실은 그것도 아니다. 가까이서 보니까 억지로 웃고 있다. 아까 붉은빛을 받으며 자유로워보이던 모습과 상극이다. 벽에 붙어있는 가면도 이 밑으로 내리고 나니 꽤나 의미심장하다.
아이가 자란 시점에, 이 둘의 관계를 짚어보자.
에바가 아이인 케빈에게 공을 주고받자고 여러 번 시도하는 장면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에바가 케빈에게 화답을 받기 위해 무척 애쓴다.
안타깝게도 이 둘 사이에 있는 붉은 공은 불화의 표시다. 계속 공을 들고 에바가 주고받기를 권유하지만, 케빈은 들은 채만 채 한다. 왜 여기서 공이 불화를 상징한다고 확신할 수 있냐면,
나중에 딸이 똑같은 채도의 붉은색 통에서 치즈볼을 나눠주는 화합적인 자세를 취하는 장면이 나온다. 에바와 남편에게 각각 치즈볼을 하나씩 나누어 주는 장면.
이것도 붙여두니 의도가 훨씬 잘 보인다.
이에 에바는 아무래도 케빈이 너무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병원도 찾아갔는데,
거기서 청력에는 이상이 없음을 확인할 때도 케빈은 붉은색 옷을 입고 있은 채로 손톱을 물어뜯고 있다.(신경증)
와중에 그 말을 듣는 에바가 앉아있는 벽의 액자에서는 케빈과 똑같은 색의 피에로가 에바와 똑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다.
잘 보시면 빛이 액자 프레임처럼 에바를 비추고 있다. 거의 상황이 에바를 조롱하는 수준.
이 자유의 성질을 갖고 있는 에바가 다소 자기 폐쇄적이면서 예측 불가한 성격을 갖고 있는 케빈에게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도로 가득한 방을 보고 비아냥거리는 케빈에게, 에바는 인내심을 갖고 자기 공간의 소중함을 설명하는데 아까 말했듯이 여행을 사랑하고 자유를 사랑하는 에바에겐 그건 굉장히 유의미한 일이었겠다.
근데 케빈은 그 이후에 방을 망쳐버린다.
물론 망친다고는 하지만, 사실 아이였던 케빈에게 이 꼬불꼬불한 선은 추상화나 다를 바 없어 보였겠다.
그리고 케빈이 어떤 의도였건, 에바는 이걸 일종의 침략으로 느끼고 분노를 느꼈을 거다. 거기다 남편인 프랭클린은 케빈의 상태에 대한 기시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에바를 매번 책망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뱃속에서 나왔고,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에바는 케빈을 자신의 자유를 침략한 사람으로 느끼게 된다. 거기다 서툰 양육방식과 남편의 반쪽짜리 이해도 한몫했을 거고. 또 영화에서 보면 그렇다고 에바가 생업을 그만둔 것 같지도 않다.
이 모든 것이 케빈과 얽혀있다.
에바에게 케빈은 아이였지만 에바의 소중한 공간을 파괴시킨 침략자이자 자신을 답 없는 문제들로 끊임없이 밀어 넣는 존재이다. 잔인한 소리이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또 모성애는 모두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보통 우리가 자기 공간을 침범한 사람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 생각해보자. 경계하고, 거부하고. 때로는 화를 내지 않나.
에바도 분노해서 케빈의 표현의 도구를 부숴버렸다. 하지만 부모 자식의 관계에 있어서는 그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반사회적인 성향의 아이가 에바의 공간을 이렇게 해치더라도 에바에게는 그를 사랑하고 보듬어야 할 의무가 있다. 설령 그것이 진심이 아니더라도.
그렇기에 에바는 자기만의 세계와 자유를 망친 케빈에게 화가 났지만, 어머니로서 요구받는 의무 탓에 어디에도 그를 주장하지는 못했을 거다. 그리고 이에 부채감을 느꼈을 거다.
에바는 케빈의 어머니이며,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건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이다.
에바의 편을 드는 것도, 탓을 하는 것도 아니라 상황이 그렇다.
케빈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하자면 케빈은 굉장히 영민하다. 어느 정도냐면, 영화 중에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떠본 다음 반응을 확인할 만큼 잘 인지 할 만큼이다.
또, 에바의 분노와 자신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읽을 만큼 똑똑하다. 보통 아이들은 감정을 느껴도 그걸 언어로 표현은 하지 못하는데 케빈은 어머니인 에바가 자신을 ’ 견디고 있다.’고 정확히 짚는다.
여기서 에바의 거부감을 읽을 만큼 케빈이 예민하고 똑똑한 아이였다는 사실은 이 관계에는 오히려 큰 독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에 손쓰기에는 에바는 자유를 상실한 탓에 산후우울증에 걸렸던 것으로 보였다.
물론 에바가 자신다움을 상실한 원인을 케빈에게 전이시켰기에, 그에게 있던 병리적인 증세도 커졌을거다.
그게 어떻게 발현되냐면
표면적으로, 그리고 다소 잘 알려진 것들로 한 번 짚어 봤을 때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가족 내 시설 증후군[Intrafam Illial Hospitalism]으로 추측된다.
먼저 가족 내 시설 증후군[Intrafam Illial Hospitalism]을 보자.
이는 가정에서 보호자가 아기에게 정서적으로 반응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파국적 증상들을 의미한다.
이에 정신의학적 장애나 반사회적 경향성 문제를 갖게 되기도 한다.
직간접적으로는 영화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냐면 기저귀를 늦게 떼거나, 말을 늦게하는 부분으로도 나타나고.
아이 때에 입던 굉장히 작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여기서, 가정 내의 보호자라고 옮기기는 했지만, 해당 이론에서 이를 설명할 때 대부분 명확하게 ‘어머니’라고 짚고 있다. 따라서 어머니에게만 양육방식을 적용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웠던 때의 오류도 세상이, 그리고 어쩌면 영화가 의도적으로 적용시켰을 수 있다고 첫 번째로 짐작해볼 수 있겠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
이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시한 개념인데, 남근기에 생기기 시작하는 무의식적인 갈등으로 제시되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는 남녀 모두에 적용되는 용어이며, 정신 발달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신경증의 발병 단계로 주목받고 있었다.
우선 지그문트 프로이트 Sigmund Freud(1856-1939)는 남자아이가 아버지를 제거하고 어머니를 독차지하려는 경향이 남근기 phallic stage(4~6세)에 분명하게 드러나며, 잠복기 latency stage(6~12세)가 되면 다시 억압된다고 주장했다. 아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아버지와 같은 위치에 서고 싶어 한다는 것. 실제로 영화에서도 그 관계에서 아버지가 거의 삭제된 것을 보면 이 관계가 프로이트 이론을 따랐다는 생각에 좀 더 힘을 실어볼 수 있겠다.
프로이트 이론에서는 어머니-아들, 아버지-딸로 신경증 질환이 발병되기도 하고, 또 거기에서 성애적 감정과 사고를 배우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 영화가 나왔던 시점에, 이 이론을 참고했다면 부녀관계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문제점들이 모자관계에서는 나타난 이유가 설명이 되며, 어머니인 에바에게 중심적으로 문제 원인이 적용되는 영화의 초점을 설명할 수 있겠다.
이 두 가지의 증세가 보이고, 또 그의 영민한 특성이 합쳐진 것처럼 보이는 케빈은
-에바가 자신을 집어던지는 것을 묵인하지만, 그를 이용해 은연중에 에바를 압박하거나
-에바가 아버지와 이혼하려고 하는 것이 살인사건의 발단이었을 만큼 어머니에게 집착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해당 이론에 따르면 보통은 자신보다 몸집도 크고 절대적 존재인 아버지에게 열등감과 좌절감을 느낄 뿐이라서 위협을 느낀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독점욕을 양보하고 아버지라는 존재를 수용함으로써 타협하고, 또 이러한 타협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극복되고 부모의 인정을 받는 사회 구성원의 하나로 거듭나게 되는데, 프로이트는 이 개념이 정신분석학에서 모든 신경증의 원형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신경증 환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에 실패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상당히 케빈의 케이스와 연결된다.
그러나, 제대로 짚자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모든 형태의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학적 측면을 무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프로이트 이론의
-유아기에서부터 성적인 동기와 파괴적인 소원에 의하여 행동이 동기화된다고 본 점.
-모든 인간에게 근친상간과 쾌락적인 충동이 있다고 한 점.
-현재의 인간 행동 이해의 근거로서 유아기의 경험들과 억압된 자율성과 책임성, 합리성을 무시한 점 등은,
정신분석의 결과에 대한 연구들이 효과성을 충분히 지지해 주지 못했고, 이러한 학설은 사실에 비춰보더라도 그러한 주장은 상당히 과장되고 프로이트 자신의 성격이 반영된 주관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그의 제자나 동료(말리노프스키)들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특수한 현상임을 실제 사례를 근거를 들어 밝혔다. 따라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실제적으로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사건이 아니라 단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프로이트뿐만이 아니라, 심리학 연구에서 가정 내에 아동심리 이론의 초점이 어머니에게만 국한된 것은 후대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이 오류까지 반영해서 생각해보자면,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케빈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에바의 양육 태도를 배제하고서라도 특수한 현상이며, 이 부분의 원인을 에바의 태도 등에서 짚는 것도 상당히 위험한 비약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겠다.
이 영화는, 아주 뚜렷한 형태로 케빈이 난동을 부려 관심을 끌려는 목적을 ‘어머니의 관심’으로 1차적으로 보여주며, 글로 기재한 것 이외에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표방하는 장면들이 꽤나 나온다.
관객들은 그럴수록 어머니인 에바에게 화살을 돌리기 쉬워지는데,
정말 영화 속 케빈의 1차적 목표가 에바가 맞다면, 이 영화는 무슨 생각을 하게 하려고 한 걸까? 이 영화로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케빈이 직접 그에 답하고, 감독의 목소리가 좀 더 잘 들리는 마지막으로 가보자.
각자 다른 대답이 나올 것 같은, 질문적 시퀀스로 가기 전,
꼭 결말처럼 보이는 이 공허한 장면부터 보자.
일단 영화 내내 케빈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에바의 눈은 텅 비어있다. 그리고 내내 왜?라고 자문하고, 생각해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에 당사자인 케빈에게도 물어보는데, 케빈은 ‘이유가 있었던 것도 같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라며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그 말을 들은 에바는 텅 빈 눈으로 케빈을 안아준 다음,
그대로 감옥을 다시 나오는데,
이 모습이 어느 장면이랑 겹치냐면
케빈을 임신한 상태에 나오는 이 장면과 유사하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 틈 사이로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빠져나오는 장면인데, 케빈을 갖게 된 이 시점에서 지금으로 이어지는 이 두 장면을 이어 보면, 이는 에바는 내내 케빈이라는 감옥에 갇혀있다는 해석으로도 이어질 수 있겠다.
외부에서도 끊임없이 벌을 주지만, 우선 케빈 자체가 에바의 벌과도 같았던 것.
그렇다면 이 영화의 답은 어디에 있을까? 이 영화는 그래서 에바가 죄가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이게 다 에바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정확히는, 감독은 이를 결론이라기보다는 관객을 향한 질문으로 드러냈다.
이 장면은 잠에서 깨어나 멍한 표정의 에바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른 채 케빈이 나오고 있는 tv를 보는 장면이다.
아래는 해당 시퀀스에서 TV 속의 케빈이 말하는 대사이다.
일단 여기서
“TV에 나오는 인간들도 한 절반 정도는 TV 속에서 TV를 보고 있어. 그 사람들이 뭘 보는 걸까? 그들은 나 같은 놈들을 봐.”
에서 1차로 현재 ‘그 사람’들이 누구냐면, TV 속에서 TV를 보고 있는 주체. 이건 에바이다. 그러니까, 1차적으로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케빈은 에바의 관심을 끌려고 사건을 벌인 것이 맞다는 것.
하지만 이 시퀀스는 하나를 더 말하고 있다. 이 부분만 말하고 싶었으면 이렇게 감독이 인위적인 장면을 넣지는 않았을 거다.
자, 큰 틀로 가보자.
“일어나서 TV를 보고 차에 타 라디오를 들으며 출근을 하거나 학교로 가겠지. (…) 그러니까 지금 당신들은 날 보고 있는 거야. 내가 말 잘 드는 범생이로 나왔으면 지금쯤 채널을 돌렸을 것 같지 않아?”
에서 궁극적으로 말하는 ‘당신’은 누구냐면, 결국 화면 너머 있고, 에바를 통과해 케빈을 바라보는 관객이다.
결국 자극과 사건의 주체는 케빈이지만, 그를 타자화하면서도 가장 조명하고 있는 것은 에바이며, 관객들은 정작 에바를 통해 이 사건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영화(TV) 속 화자도 감옥(TV 속의 TV)에 갇혀 있는 케빈이 아닌, 에바이고.
많은 아동 양육 가치관에서도, 이 사건의 진짜 원인을 ‘나쁜 어머니’인 에바로 맞추기도 하며,
그에게 케빈이 받아야 할 만큼의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장면은 결국 이 자극적인 사건의 핵심은 케빈이라는 것 또한 짚는다.
나는 이 장면이 우리가 집에 가서 TV를 보며 누군가를 타자처럼 보지만, TV 속의 사람조차 실은 그 안에서 누군가를 소비하고 있을 정도로 우리가 상황을 납작하게 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 요지라고 봤다. 그 소비는 대부분 케빈같이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납작하게 바라보는 형태로 발현되는데, 정답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과연 이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옳은지 제4의 벽을 뚫고 감독이 케빈의 입으로 직접 물어보는 장면이라고 읽힌다.
이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단순한 답이건, 감정이건, 함께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를 토대로 수강생 분들에게 착안점을 보여주기 위해, 내가 먼저 아래와 같이 그림으로 그려서 소개했다.
원작 그림도 유명한 그림이어서 아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바로 인터넷에서
‘실수로 아들을 죽인 아버지’라는 이미지로 알려진 일리야 레핀의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유명한 이미지이지만, 대답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와 각각 내용 속 주제는 상반된다.
이 그림이 현대에 와서도 화제가 되는 것은 사실 그 충격성, 그리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는 이야기 설명으로 인해 전해지는 감정이 주된 원인이다.
그렇지만 이 그림을 습작 자료로 선정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이 그림에 얽힌 이야기 때문.
뇌제 이반은 왜 황태자인 자신의 아들을 죽이게 되었을까.
우습게도 그의 아들도 아닌, 며느리의 옷차림 때문이다. 1582년 11월 15일, 이반 뇌제는 출산을 앞두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황태자비가 시아버지이자 황제인 자신을 속옷 차림으로 맞이하자, 모욕이라며 황태자비이자 자신의 며느리를 폭행한다.
이 소동에 황태자가 아내의 편을 들며 역정을 내자, 이성을 잃은 이반 뇌제는 아들의 머리를 내려치는 바람에, 죽게 되었다.
즉, 여성이 시대상에 걸맞지 않은 옷차림을 했다고 해서 살인까지 일어나게 된 것.
현대에 와서는 그림의 힘에 걸맞지 않은, 상당히 시행착오적인 서사라 볼 수 있지 않겠나.
그리고 이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에바의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그래서 사람을 죽인 아들에 대한 에바의 혐오감, 그를 방조했다는 부채감,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침범하고 자신을 삶을 고통에 빠트린 이에 대한 분노를 묶었다.
정확히는 케빈에게 향할 화살이 에바로 치환되고 있었으니, 그걸 한 번 겹쳐서 볼 수도 있게끔 그려보았다.
어머니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여성
그 시대에 걸맞지 않은 옷을 입은 여성
특정한 사건에 어떤 잣대를 겨눌 때에 어떤 방식으로, 어떤 비판력을 갖고 겨누는 것이 좋을까.
케빈에 대하여 같은 영화로 그 비판력을, 그를 자신의 목소리로 녹여내는 법을 조금은 더 예리하게 만들 수 있겠다.
이렇게, 수업에서는 해당 결론 이미지의 착안 과정과 풀이까지 해설한 후, 수강생 분들과 함께 감정을 주제로 착안 스케치들을 해본 후 12월 첫 번째 수업은 마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