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하루를 보낸 나에게
이직을 준비하던 시기의 일이다. 한 헤드헌팅사의 컨설턴트가 사전 면담을 제안한 적이 있다. 채용 중이던 게임 회사 통역사 포지션에 지원 의사를 밝히자, 직접 만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틀 뒤 나는 헤드헌팅사가 위치한 종각역 근처 빌딩을 방문했고, 그녀는 약속 시간이 20분 정도 지나 회의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통번역 경력이 없으시네요?"
방금 인쇄해 가져온 듯한 내 이력서를 넘겨보며 던진 첫 질문이었다. 경력직 채용 건이었다. 경력이 없다면 우리가 마주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지난달까지 모 회사에서 통역과 번역을 했다고 설명하자, "이거 최신 이력서 주신 거 맞아요?" 하면서 몇 장 되지 않는 이력서를 뒤적거리다 "아, 이력서 이렇게 쓰면 헷갈려요"라고 했다. 해당 내용은 가장 첫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이후의 면담 내용도 비슷했다. 당황스러운 질문과, 당황스러움을 티 내지 않으려는 답변. 내 이력서를 그 회사에 잘 전달해 줄지도 신뢰가 가지 않았다.
다음 날 친한 언니를 만나 점심을 먹으며 전날의 인터뷰 이야기를 했다. 컨설턴트의 준비되지 않은 자세와 프로답지 않음에 대해 불평하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면담을 마치긴 했는데 잘 진행이 안 될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 말을 귀 기울여 듣던 언니의 반응은 나의 예상과 달랐다.
"넌 그런 상황에서도 참 차분하게 대응을 잘한다."
그전까지 나는 전날 면담에서의 아쉬운 장면만 계속해서 꺼내보고 있었다. 그 컨설턴트와 조금만 결이 맞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자연스럽게 얘기하려고 했는데 기분이 안 좋은 게 티가 났으려나? 하면서. 혹시 지원 절차에서 뭔가 잘못될까봐 속으로 동동거리기도 했다. 차분하게 잘 대응을 했다는 언니의 칭찬이 멋쩍게 느껴졌다.
그 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작은 습관 하나를 깨달았다. 내가 경험한 일에 대해 생각할 때 스트레스를 받은 부분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잘 되지 않은 부분과 어렵게 느껴졌던 부분을 확대해서 생각하고, 내가 일을 잘 마무리했다는 사실은 아무렇지 않게 넘겨 버린다. 나의 역량과 집중력을 끌어모아 어려운 과업을 잘 처리했음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당연히 잘했어야 하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성공으로 끝난 경험이 자신감과 성취감을 높여주지 않는 것이다.
회사에서 규모가 큰 프로젝트나 어려운 업무를 소화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시작하기 전 큰 부담을 느꼈던 감정, 그리고 일을 끝낸 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내게 어려웠다”라는 생각에만 집중하지, “어려웠지만 끝까지 잘 마무리했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렸다. 하루 종일 나를 채찍질하며 일을 하면서도 부정적인 생각만 기억 속에 강하게 남기고, 몸과 마음이 있는 대로 지쳐버린 채 퇴근하곤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한 가지 장점만 보여도 멋지다며 칭찬하고, 잘 해낸 일이 있으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정작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점수도 주지 않고 넘어가버렸다. 돌아보면 그동안 꽤 많은 일들을 잘 해내면서 살아왔는데도 칭찬은 못 해줄망정 참 엄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오늘 하루만 해도 여러 가지 일들을 실수 없이 하기 위해 마음을 들이고 시간을 쓴다. 하지만 잘 해내지 못한 것, 내일로 미루기로 한 일, 나의 부족함을 느낀 경험만 생각하며 나를 압박하고, 이는 실패감과 낮은 자존감으로 이어지기 쉬운 것 같다. 스트레스가 큰 사건만이 강렬하게 남기 때문이다. 나를 칭찬하는 습관을 들여서 내가 잘 해낸 경험이 좋은 기억으로 차곡차곡 쌓일 수 있도록 해 보기로 했다.
어디서부터 칭찬해주면 좋을까 생각하다, 우선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 비도 오고 차도 밀려서 짜증 났는데, 그래도 안 늦고 잘 출근했어. 오늘 내가 먹고 싶은 메뉴는 못 먹었지만, 내가 양보해줬어. 오늘 일이 잘 안 풀렸는데, 곧바로 포기하지 않았어. 이번에 산 책이 어려워서 많이 못 읽었지만, 이만큼 도전한 나를 칭찬해. 고단한 하루를 보낸 나에게 그래도 잘했다고, 기특하다고 칭찬해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