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나라 아프리카 카메룬..
비행기를 정말 원 없이 탔었다. 아프리카 카메룬이 최종 목적지였다. 그 당시 한국은 막 IMF가 터질 때라 나라가 불안정했다. 한국을 떠나기엔 딱 좋은 상황이었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으로만 기억된다. 카메룬까지는 직항이 없기에 프랑스에서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다. 유럽의 겨울이 얼마나 추운지 그때 알았던 것 같다. 낯선 타국에서의 밤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30년 가까이 된 기억이 얼마나 생생 할 수 있겠는가? 정신없이 이민가방을 끌고 시어머니뒤를 쫓아가던 기억뿐이다. 남자친구 아니 남편의 복잡한 집안사정을 다 말할 수는 없고 여하튼 시어머니는 남편의 새엄마였고 현재 카메룬에는 이복형제가 살고 있었고 시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책임감으로 남편을 불러들인 것이다. 당시 시아버님은 카메룬에서 사진관을 하고 계셨는데 그 규모가 꽤 컸다. 소위 지금으로 말하면 체인점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지점이 계속 늘어나면서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시 새시어머니는 여장부 스타일로 모든 일들을 진두지휘하면서 사업을 했고 후에는 남편과 트러블이 많았다. 여하튼 나는 사실 나 만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아프리카와 유럽은 굉장히 가까웠다. 그래서 내 딴에는 자리가 좀 잡히면 유럽으로 유학을 갈 생각이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쓰기에 디자인을 배우고 싶었었다. 신랑에게는 미리 말을 해놓았고 몇 년 후 가게가 안정되면 보내주기로 약속을 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아프리카에 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생고생하면서 카메룬에 도착을 했다. 카메룬은 내가 생각했던 아프리카가 아니었다. 나의 머릿속에서의 아프리카는 야생동물들이 뛰어놀고 원주민이 이상한 옷을 입고 움막 같은 곳에 살 거라는 착각을 하는데 실상은 아스팔트와 시멘트건물에서 살고 있고 야생동물은 아주 멀리 인접국가 국경에나 가야 볼 수 있다 했다. 그리고 한나라이지만 두나라 언어를 썼다. 영어와 불어를 썼다. 한나라를 두나라가 점령을 했기에 각기 다른 말을 사용했던 것이라 했다. 우리가 가는 지역은 불어를 쓰는 지역이었다. 영어도 못하는데 불어로 소통을 해야 하니 난감하기만 했다.
카메룬 공항에 도착을 하니 운전기사가 마중을 나와있었다. 눈에 보이는 건 온통 검은 사람들뿐이었다. 후덥지근한 바람과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냄새와 황인종인 우리지만 아프리카 사람들 속에 섞여있으면 유달리 하얗게 보이는 착시현상처럼 30년 전 아시아인들은 굉장한 눈요깃감이었다. 가는 곳마다 신기한 듯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공항에서 네댓 시간 떨어진 곳이기에 부지런히 차를 타고 출발해야 했다. 아프리카는 건기와 우기가 있기에 도로가 거의 폭탄 맞은 것처럼 포트홀이 파여 있었다. 자칫 잘못해서 포트홀에 빠지면 대형사고이고 어두워지면 위험했기에 빨리 움직여야 했다. 당시 카메룬은 독재정치로 대통령이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부패정권의 썩을 때로 썩은 막장 정부였던 걸로 기억한다. 사소한 것이라도 뒷돈이 아니면 안 되는 나라였다. 몇 시간을 곡예하듯 운전하는 차에 앉아 서 귀에 들리지도 않는 불어를 들으며 드디어 시아버님이 계시는 집에 도착을 했다. 아프리카는 더운 줄만 알았는데 고산지대였던 그곳은 밤에 전기장판이 없으면 잠을 못 잘 정도로 추웠었다. 차에서 내리니 시아버님이 반가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시아버님은 매우 마른 체형에 머리가 벗어지셨지만 말씀을 위트 있게 하시고 재미난 분이셨다. 반면 새시어머니는 조금 무지하고 고집이 센 편이셨는데 딱 봐도 기가 세 보이시는 그런 분이셨다. 그곳에선 가까이 한인교회가 있었는데 교회의 모든 재정을 새시어머니에게 의존하였기에 시어머님은 영향력은 신과 같았다.
시어머니도 가족 보다 항상 교회가 먼저였고 후에 남편과 시어머니의 불화에서 교회가 한몫을 했다. 종교를 뭐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사칭한 인간들의 권력놀음이 실었던 것뿐이다.
새로운 환경에서의 첫날밤이 어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남편들은 피우지 않는 담배를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나만 피웠다. 집안 모든 일을 가정부가 맡아했고 여자들은 온종일 교회에 나가 있거나 골프며 테니스를 배우고 그 나라 언어인 불어를 배우며 하루 종일 빈둥대는 것이 일과였다. 낯선 환경과 낯선 사람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기에 나도 점차 조금씩 적응이 되었다. 내 남편은 지독한 짠돌이 구두쇠였다. 중학교 미팅 때 만나서 지금까지 나는 나만 바라보고 나만 기다리는 지고지순한 남자라 생각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사람도 한편으로는 참 불쌍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억척스러운 엄마밑에서 혹독한 현실을 이겨내야 했으니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땐 나도 전남편도 너무 어린 나이였다. 내가 이렇게 죽음을 앞에 두고 아니 죽음을 옆에 두고 지난날들을 회상해 나가면서 내 삶을 정리할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 30년이 흘렀어도 생각이 나는 것을 보면 내 젊은 날의 한 페이지였고 그 또한 하나의 추억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카메룬이 나의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만들어준 곳이었기에 나는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들을 세세하게 적어보려 한다. 왜곡된 기억들과 생각들과 감정들이 뒤섞여 있겠지만 찬찬히 꺼내어 적어보려 한다. 인간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매번 닥쳐오는 선택의 순간들이 만나 현재의 내가 된 것처럼 과거의 나의 선택들을 되짚어 보면서 생각을 해본다. 당분간 나의 카메룬 적응기를 써 내려가겠지만 나 역시 이번생이 처음이라 모든 것들이 후회투성이일 것이라는 것은 미래의 나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