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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사의 갈림길에서 나는.. 12

카메룬...... 적응기

by 오로라맘

우리가 살던 곳은 2층건물이었다. 아래층엔 사진관과 현상소와 창고가 있었고 그 위층에 시부모님과 배다른 이복형제와 우리 부부 그리고 생긴 건 곰이지만 하는 짓은 여우 같은

가정부와 얼굴은 생각도 나지 않던 경비와 사진관 직원들이 있었다. 직원들은 몇 명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5~8명 사이로 기억된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는지는 그곳에 가서야 알았다. 흥이 많은 아프리카 사람들은 노는 것만큼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지 말이다. 사진관에는 지점이 있었다. 각 지역별로 사진사들을 심어놓고 그 사람들이 다른 사진사들이 찍은 필름들을 걷어와 사진관에 현상을 맡기는 것인데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무슨 명절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어떠한 행사가 있는 날이면 몇 날 며칠을 밤을 새워서 사진을 현상해야만 했다. 필름과 부자재와 사진기들을 팔아들이는 수익도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경영을 관여하지 않아 잘은 몰랐지만 모든 행사가 끝난 날이면 마대자루에 돈을 담아와서 넓은 거실 가득 돈산을 쌓았다. 계수기가 없었기에 일일이 돈을 수작 업으로 분류해서 금고에 보관을 해야만 했다. 은행이 있었지만 돈을 맡기려면 돈을 주고 맡겨야 했고 또한 세금탈세를 해야 했기에 항상 돈을 커다란 금고에 보관을 했었다. 푼돈이 산처럼 쌓여서 목돈이 되는 것이다. 수완이 좋은 시어머니가 사진사들을 모으고 기술자역할인 시아버지가 사진을 기가 막히게 현상을 했기에 언제나 우리 사진관에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시아버지는 한국에서 아직 이혼이 안 돼있는 상태였다. 한국의 시어머니가 절대로 이혼을 해주지 않았기에 카메룬에 있는 시어머니는 항상 그 문제로 시아버님을 닦달을 하셨다. 어떤 연유로 그 머나먼 아프리카까지 가서 사업을 하신 지는 모르겠지만 시아버님 성격으로는 절대 그 모든 성공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장사가 워낙 잘돼서 관리자를 쓰기는 했어야 했다. 그러던 중 시아버님은 마음 한편의 아픈 손가락인 당신 아들이 눈에 아른 거리셨던 것이고 시어머님은 어쩔 수 없이 남편의 말을 따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만 아니었다면 아마도 전남편은 아직도 그곳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나는 남편의 순수한 마음만을 믿었었다. 다시 말해 내 뜻대로 내 맘대로 남편이 따라줄 거라 생각을 했었는데 그것은 나의 오만한 착각이었다. 남편은 철저히 자기 자신만을 믿었다.

지위가 사람을 만든다 했던가? 진짜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모든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큰 사장님의 아들이니 모두들 떠받들어 주었다. 한국에서의 오징어는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 하기에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고 생전처음 보는 사람들과 시부모님과 시동생... 그때 내 나이가 23~24 이였을 것이다. 지금 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어린 나이지만 30년 전에는 20대 초에 다들 결혼을 했던 때였고 나에게는 도피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만들어준 것이 결혼이라는 허울이었기에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멍청한 짓을 나 스스로가 했던 것이다. 만약 그때에 전남편의 따뜻한 위로와 사랑이 있었다면 나는 적응을 잘하고 살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갑내기인 우린 너무 어렸다. 반려자라는 말을 서로 알 수 없었다. 서로 안 지기 위해 싸우고 배려보다는 독점하려 했고 나만을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젊음은 그런 것이지 않던가 그 당시엔 몰랐다. 사랑이란 책임이라는 것을 말이다. 남편과 시부모 사이에서의 재산다툼과 좁혀지지 않는 의견차이로 나는 서서히 지쳐갔다. 그러던 주 시아버님이 남편을 독립을 시켜주었다. 서울에서 대전 정도의 위치에 사진관을 내준 것이다. 아래쪽 사진사들도 포섭하기 위한 방책이긴 했지만 내가 생각할 땐 중간에 시아버님도 아내와 자식사이에 나처럼 지치신 듯했다. 여하튼 그렇게 우리는 시부모에게서 벗어나 온전히 남편의 힘으로 새롭게 시작할 가게를 얻었다. 1충과 2층으로 된 그리 넓지 않은 가게였다. 오전에 남편이 1층 가게로 내려가면 나는 하루 종일 집안에서 빈둥거렸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말도 통하지 않았고 그곳은 시골이라 마땅히 어디 갈 곳도 없었다. 테니스를 배우고 가정교사가 와서 한두 시간 불어를 배우고 운전연수를 하고 삼시세끼 먹을 밥을 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나는 아이를 갖고 싶었다. 그곳에서 적응하고 오래 살려면 아이를 키워야 할 것 같았다. 남편도 불안한 나의 마음을 읽었는지 아이를 빨리 갖자고 했고 얼마 후 나는 임신을 했다. 임신초기라 입덧이 심했다. 하루 종일 배 위에서 있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 서있을 수가 없었다. 먹지를 못하니 기절해 쓰러지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남편이 행사가 있어 집을 비웠을 때였다. 집에 일하는 가정부가 오후 6시에 퇴근을 하고 나 혼자 집을 지키고 있을 때 아랫배가 뒤틀리듯 아프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가서 보니 하혈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배가 너무 아파서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바닥에 엎드려서 아픈 배를 쥐어 잡고 1층으로 기어서 내려갔다.진통이 오듯이 배가 아팠다. 그럴 때마다 하혈의 양이 많아졌다. 1층계단까지 몸을 끌면서 내려갔다. 그 당시에 아프리카에 휴대폰이 있을 리 없었고 남편도 없으니 1층 경비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기어내려 갔던 것이다. 굳게 닫힌 철문을 열 수가 없었다. 도둑이 들까 문을 이중으로 해놨기에 밖에서는 열 수가 없었다. 나는 문을 두드리면서 소리쳤다. 살려달라고 말이다. 경비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위급함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나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었기에 점점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정신을 막 놓기 전에 다급한 목소리와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경비원이 행사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남편이 사진사와 함께 온 것이다. 문이 열리고 피범벅이 되어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혼비백산해서 차로 가까운 병원으로 데려갔다. 차시트가 피에 젖어 흥건했다. 병원에서는 응급으로 시술을 해주었다. 30년 전 아프리카 시골병원의 의료기술이 어떠했을까? 열악한 환경과 열악한 도구로 처치를 했으니 탈이 안 날 수가 없을 수가 없지 않은가. 그로부터 며칠 뒤에 또 한 번 수술을 받게 되었다. 태반 찌꺼기가 몸 안에 남아 있던 것이었다. 나는 그때 죽을 고비를 한번 넘겼다고 생각한다. 마취를 받고 수술을 받던 중 이상한 꿈을 꾸었다. 진짜 커다란 여객선 같은 배에 사람들이 타는 것이다. 나도 그 배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아직 탈 수 없다고 나를 밀어냈다. 당시에는 어찌나 서럽던지... 지나고 보니 그 배를 탔다면 나는 아마 죽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여하튼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만정이 다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다 재미가 없고 고향이 그리웠다. 소위 향수병이 걸린 것이다. 그런 내가 불안했던지 남편이 나의 큰언니와 조카를 아프리카로 불러들였다.

가족이 있으면 내가 안정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큰언니는 당시 이혼상태라 한국을 떠나고 싶어 했기에 남편의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아프리카로 온 것이다.

큰언니와 조카가 오니 몇 달은 그런대로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나의 마음은 한국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프랑스 유학도 다 필요 없고 오로지 대한민국 서울로 빨리 가고 싶었던 것이다. 돈이고 명예고 다 필요 없이 오로지 한국만 빨리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남편에게 한국에 보내달라 했다. 남편도 나의 피폐함의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을 했는지 동의를 해주었다. 2년이 다 못되어서 나는 혼자 한국으로 들어왔다. 큰언니와 조카는 카메룬에 두고 왔기에 남편도 안심하고 보내주었던 것이다. 나 혼자 간다면 내가 다시 안 돌아갈 것을 예견했을 것이다. 물론 카메룬이 아주 악몽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때로의 추억과 감동도 있었고 내가 살아생전 다시 아프리카에 갈 일이 있겠냐마는 나름대로의 재미난 일들도 있었다. 이젠 아스라이 머나먼 기억 속에 존재하는 신기루 같은 곳이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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