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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나는... 9

삶이란 그런 것이다.

by 오로라맘

가게 문이 닫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일을 하면서 한 번도 가게문이 닫는 날을 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사장님께 전화를 했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 궁금했다. 사장님께서 사모님이 아파서 병원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그런 줄 알았다. 그냥 진짜 잠깐 어디가 아프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사모님께서 돌아가신 것이다. 인생이란 그렇게 허무한 것이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사모님과 사장님과 아들 셋이 성신여대에 있는 가게를 끝마치고 오토바이를 타고 청량리 본가댁으로 귀가하던 중에 교통사고가 났던 것이다. 셋이 다 넘어져서 다쳤는데 사장님과 아들은 다리에 찰과상을 입었고 사모님만 멀쩡하셨다. 겉으로는 말이다. 찰과상을 입은 두 사람은 병원 치료를 받았고 겉으로 멀쩡하셨던 사모님은 아무런 조치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셨고 며칠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지내신 것이다. 사고 난 다음날 사모님께서 내게 머리에 큰 혹이 났다고 말을 했었다. 그땐 어렸고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기에 그냥 그런 줄 알았다. 머리에 난 그 혹이 내출혈의 조짐임을 그 당시엔 알지 못했다.

무지한 어린 우리와 무심한 어른 신랑이었다. 평소에도 사장님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눈이 부리부리하게 크고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지독한 마마보이였기에 친가식구들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고해바치는 재수 없는 어른이었다. 당시 시누이가 몇 명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욕심이 얼굴에 가득 많던 사장과 똑 닮은 누나들이었었다.

사모님께서 허무하게 돌아가신 날부터 남자사장은 집에 안 들어갔다. 무섭다고 말이다. 죽은 아내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무서워 집에도 못 가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루도 가게를 쉬지 않고 문을 열었다는 자체도 이해가 되질 안았다. 우리는 사모님 발인에도 장례식장에도 가지 못했다. 가게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엔 아침 9시에 문을 열어 밤 10시에 닫았다. 20살 우리들은 너무 무지하고 뭐가 문제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착하고 사랑스러운 사모님 조문도 가지 못했던 것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장례식장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고 그저 가게만 잘 지켜달라 했기에 그런 줄 알았다. 사모님을 땅에 묻자마자 탐욕스러운 시누이들은 가게에 나와서 매장을 발칵 뒤집으면서 보험증서를 찾았고 아침마다 출근을 해서 전날 판 매출대금을 침을 묻히면서 세어서는 챙겨가셨다. 그것까진 참았다. 하지만 사모님 삼칠일이 지나자마자 재혼얘기를 하는 걸 듣고는 남자친구와 나는 무단으로 가게를 그만두었다. 어른이란 것들이 참 해도 너무 하다 싶었다. 우리 소식을 들은 본사언니가 나에게 연락이 왔었고 그간 모든 이야기를 전하니 본사언니도 어이가 없어했다. 그 언니는 본사를 퇴사하고 결혼을 할 거라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종로도매상가에서 일해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봤고 나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기에 나가고 싶다 했다. 32년 전 월급이 얼마였는지 잘 기억나진 않지만 70에서 팔십 정도 받으면 잘 받는 수준이었는데 나는 100만 원 정도 받는 걸로 얘기해 주어서 업계최고로 대우해 준다 했었다. 그 당시에는 종로 귀금속 거리가 생기기 한참 전이라 도로변은 카메라 전문점들이 많았고 안쪽은 이제 귀금속 도매상가가 몇 개만 있을 때였다. 내가 일하게 된 곳은 총판이라고 귀걸이 반지 팔찌 목걸이 등 모든 것을 파는 곳이었다. 도매는 소매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사장은 남대문에서 액세서리와 10k를 파는 가게를 하고 있었고 종로에 매장을 또 열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고 거기에서 내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요즘 유행했던 반딧불 노래 가사처럼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다. 실상은 개똥벌레였지만 그 당시에 나는 진짜 유아독존이었다. 내가 제일 잘 나가는 줄 알았다. 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쌈닭처럼 싸웠고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 나를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고 친구도 가족도 남자친구도 다 내 말에 따라 움직여주지 않으면 화를 냈었다. 나는 그렇게 나만의 자아도취에 빠져 살았었다. 그 당시에는 주얼리를 파는 직업을 가진 판매원들이 많지 았았기에 누구에게 일을 배울 일도 없었고 나 스스로 터득해서 일을 하고 나의 커리어를 쌓아갔다. 내가 일을 하고 있던 가게는 이제 막 주얼리를 시작하는 상태라 단골도 없었고 이렇다 할 특징도 없었지만 33년 그 당시에도 10k를 팔정도로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내수시장뿐만이 아니라 해외수출까지 생각을 하는 사장님의 그 야망이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부부인 여사장님은 판매를 담당하고 남자사장님은 공장에서 제품을 만들었다. 줄 뽑는 기계가 있어서 하청을 주는 공장도 있었다. 종로도 도매와 도도매를 하는 곳이 있고 우리 가게는 도매를 하는 곳이었다. 33년 전에 주얼리 디자인이란 지금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촌스러웠지만 물건은 잘 팔렸다. 그 시절에는 무엇이든 잘되는 시절이었다. 경기가 좋은 시절. 불황이 없던 시절. 소위 말하는 황금의 시절이었다. 커플링이 막 생겨나던 때였다. 그때 유행했던 유색알이 캣츠아이라는 알이었고 탄생석 목걸이가 한참 잘 나가던 때였다. 그 당시에는 행사가 끼어있던 달이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손님이 끊이질 않았으며 발밑에는 포장하고 남은 쓰레기가 쌓여 치울 수도 없음 만큼 바쁜 시절이었다. 순금 한 돈이 30,000이었던 때였으니 14, 18k는 귀금속도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남자사장님은 나를 센스 있게 봐주셨다. 나에게 팔고 싶은 물건들을 말해주면 제작해서 팔게 해 주셨고 손님들의 요구사항과 문제점을 말하면 바로 시정해 주고 피드백을 해주려 노력을 해주셨다. 그 당시에는 나까마라고 지금의 중개상인처럼 물건을 대행해서 팔아주는 시스템이 관행이었다. 가게에서 직접 사입해서 파는 사장들은 물건을 안팔정도로 나까마들의 힘이 셌었다. 운 좋게도 2층에 있었던 우리 가게 앞에 유명한 수입이태리체인 집이 있어서 우리 가게는 어부지리효과를 볼 수 있었다. 나는 한 손님 한 손님한테 최선을 다했다. 단한개를 사더라도 비싼 대추차를 시켜줬고 어느새 우리 가게는 나까마들의 사랑방이 돼있었다. 부담 없이 시켜준 대추차가 그들을 불러 모은 것이다. 한 명 한 명이 다른 나까마들을 소개를 시켜주고 새끼를 쳐서 점점 손님들이 불어났다. 그 당시에는 메달과 체인이 분리가 되는 목걸이가 대세였는데 우리 가게는 일체형 목걸이를 신상품으로 내놓았었다. 지금은 일체형 목걸이가 대세였지만 그 당시에는 많지 않은 디자인이었다. 물결모양 번개모양 에스자 모양 등 다양한 디자인의 시리즈를 팔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의 눈에 띈 우리 가게에서 줄을 떼어다 파는 어느 가게의 디자인 눈에 들어왔다. 그 당시 김남주가 주연이었던 드라마에서 착용한 목걸이를 도용해서 팔고 있던 한가게의 목걸이였다. 나는 친구를 시켜 목걸이를 사 오게 한 뒤 사장님께 의뢰를 맡겼다. 우리 가게에서 일체형 목걸이를 계속 팔고 있던 터라 어느새 나까마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 것이다. 우리 가게가 그 김남주 목걸이의 원조라고 말이다. 우리는 종로에서 소위 말하는 금복권에 당첨이 된 것이다. 그것도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신생 가게에서 말이다. 그 당시에는 그 상황이 얼마나 대박이었는 줄 몰랐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알았지만 말이다. 아침에 문을 열면 나까마들이 돈가방을 들고 줄을 서서 목걸이를 시리즈별로 사갔다. 그 당시에는 전국구여서한나까마가 한 번에 몇십 벌을 사 갖던 때였다. 선금을 주면서 물건을 주문하고 공장은 밤낮으로 기계를 돌려도 주문을 따라갈 수 없었으며 덩달아 다른 품목의 제품들도 불티나게 팔려갔다. 목걸이뿐만 아니라 팔찌. 반지. 귀걸이등 모든 품목들이 골고루 팔려 나갔다. 우리 가게는 소위 돈방석에 앉았으며 일등공신은 나였던 것이다. 그땐 알지 못했었다. 사장사모의 검은 속내를 말이다.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끝이 없고 탐욕스러운지를 말이다. 공장에 사람들을 더 뽑고 종로에 우리 가게 수리방이 생겼다.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일을 나오게 되었고 그 사람들은 나를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봤으며 함부로 나를 대하지 못했다. 가뜩이나 자만에 빠져있던 내가 얼마나 더 기고만장했을지 알 수 있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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