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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뭇잎 Oct 14. 2024

이토록 공부가 재미있어지는 순간이 올까?

11살 아들 주혁이가 영어 단어 시험을 본 후 울었다. 정확하게는 쌍둥이 딸, 주아에게 주혁이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엄마, 오늘 영어 단어 시험을 20개 봤거든. 그런데, 주혁이가 공부 열심히 했는데 시험을 못 쳐서 속상했나 봐. 다음 주에 재시험을 본대. 난 백 점인데.”

주혁이는 알리기 싫어하는 눈치인데, 주혁이 눈을 슬쩍슬쩍 보면서 주아가 열심히 나에게 학원에서의 상황을 전해준다. 공부에 크게 관심이 없는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결과가 아쉬워서 울었다는 게 의아했다. ‘아니, 집에서 단어 하나 외우는 걸 본 적이 없으니 점수가 낮은 게 당연하지. 왜 울었을까?’ 속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엄마는 성적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단다. 건강하게 자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하는 어른이란다.’를 보여주고 싶었다. 살짝 미소를 띤 채 물었다. 

“주혁아, 왜 슬펐을까?”

“나 학원 시간보다 1시간 일찍 가서 공부했는데. 많이 틀렸어. 주아는 다 맞았는데.”

아들, 어쩌니. 학년이 올라가고 상급학교로 진학 후에는 어찌 될지 몰라도, 현재로서는 딸이 아들보다 공부 머리가 더 있는데. 대문자 T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나 F인데)

“앞으로는 2시간씩 공부하면 되겠다.”

아차, 싶었다. 공감 능력제로. 아들 눈은 더 슬퍼 보였다. 하지만, 이 말은 아들에게 하는 말이 아닌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부족하다 싶으면, 지금까지의 노력을 넘어선 무언가를 하면 될 것을. 왜 일이 어려운지만 다른 이에게 잔뜩 설명하고 애쓰는 시간을 들이지 않았구나 싶었다. 해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그저 변명만 늘어놓은 거다.


《이토록 공부가 재미있어지는 순간》(박성혁, 다산북스)을 책방에서 중학교 1학년 남학생 6명과 함께 읽었다. 책을 읽은 소감으로 ‘의미는 있었지만, 재미는 없었다.’, ‘별점 5점 중에서 1점을 주겠어요. 제목에 공부라는 글자만 들어가도 머리가 아파요.’라고 했다. 지금 내 나이 40대 중반이 되어서야 책에서 말하는 공부의 의미에 동의가 되니, 이제 막 중학생이 된 10대 청소년에겐 와닿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도 모르겠다. 0교시부터 야간자율학습까지, 하루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던 때 투덜거렸다. ‘국어, 영어, 수학 배워서 뭐 해. 이렇게까지 공부에 시간을 보내는 건 참 쓸모없는 일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아니, 최근까지도. 수학에서 부채꼴의 넓이 구하는 방법을 배워도 살면서 부채꼴을 본 적도 별로 없는데. 영어는 번역기 돌리거나 앱에서 또박또박 음성지원 해줄 텐데 뭐가 걱정일까 고개를 갸웃했다. 당장 써먹기 위해서 배운다는 차원 높지 않은 사고 단계에 머물렀다. 책에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크게 특별한 문장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평범한 사실을 왜 이제야 깨달았지? 우리 아이들은 나보다는 더 빨리 깨우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모든 배움의 목표는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공부의 본질은 나를 영혼이 강한 사람으로 단련시킵니다.’라고.


노력해서 배우는 일의 가치를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계단식 성장. 물론, 내 글쓰기 능력은 계단식 성장도 아닌 답보 상태가 아닐까 싶지만. 세상에는 배울 게 많은 정도가 아니라 눈 뜨고 일어나면 세상이 휙휙 변해 있다. 알아야 하는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만 한다. 익힘의 많은 부분을 영리한 기계로 대치할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공부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나이 들어서 많은 사람이 하는 후회 중 ‘나는 왜 공부를 하지 않았을까?’ 라던데. 나도 요즘 그렇다. 나는 왜 학창 시절에 더 노력하지 않았을까? 나는 왜 고등학생 때 엎어져서 잠만 잤을까? 꿈이 없어서였다. 관심도 재능도 없는 수학과 과학에 노력을 들여서 어디다 써먹냐 싶은 심보였다. 모든 게 귀찮았다. 꿈꾸지 않고 멍 때렸던 나의 10대, 20대가 안타까웠다. 이토록 공부가 재미있어지는 순간도 나에게 오면 좋겠다는 마음이 일렁였다. 어디에 써먹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닌 그냥 자체로 재미있어지는 찰나를 경험하고 싶었다. 20대 때 같은 전공을 공부하던 30, 40대 나이 많은 언니들이 생각났다. 나도 할 수 있을까? 만학도. 수능을 다시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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