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니버서리 Jun 18. 2024

시인(詩人)​

'04


시인(詩人)



. . . . . . . . . . . .

페이지는 몇 방울의 잉크와

여백이다

잉크에서 냄새가 나고, 축축하다

여백이 갓 나은 잉크는 그러나

여백이 아니다

잉크 방울이 작을수록 여백은 크다

여백이 넓을수록 묻는 잉크의

작고 진한 방울

여백의 진통이 크게 오래 우는 잉크를 낳고

그 처음

떠는 여백을 붙들어 줄을 맨 사람








*20년 만에 다시 보니


 밀레니얼 시대가 막 열린 2000년대의 초입 무렵 나는 시를 참 좋아했다. 지하철에서 수시로 시집을 읽었고 떠오른 것을 노트에 끄적이느라 내려야 할 정거장에서 못 내리고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무엇에 그렇게 끌렸는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지 갓 스무살 나는 그런 조금 수상한 아이였다.


 이 시는 2004년 겨울에 쓴 짧은 시이다. 시가 축적일수록 시집의 페이지에 잉크가 적게 묻는데 역설적으로 그만큼 여백은 크다는 데서 착안했던 걸로 기억한다.  가지 시어의 상징만을 이용해서 투박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너무 압축하려다 보니 부드럽게 읽히지는 않는다.


 작고 진한 잉크 방울을 낳은 것은 여백만큼 컸을 시인의 고뇌의 시간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창작의 진통이 큰 만큼 오래 여운을 남기는 시어들을 낳는다. 시적화자는 잡히지 않는 추상과 이미지들을 활자에 잡아두는 시인의 특별함을 추앙하고 있다.


 한 줄 평: 스무 살 언니버서리는 시인을 추앙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시란 무엇인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