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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차를 팔기로 했다.

마이카를 보내는 마음

by 한줌

서울로 거처를 옮긴 지 넉 달째, 아직 완전한 이사는 아니지만 사실상 생활을 이곳에서 하다 보니 많은 점이 달라졌다. 특히 하나를 꼽자면, 출퇴근을 대중교통으로 한다는 점이다. 지방에서는 필수였던 자가용이 서울에서는 거의 쓸 일이 없어져 주차장 신세가 되어버렸다. 버스로 한 번에 출퇴근이 가능한 데다 요금도 할인이 된다. 한 달 교통비를 셈해보니 주유 등 차량 유지비보다 적었다.


그래도 차는 참 편리한 물건이라 '주말에만 가끔 써도 없는 것보다 낫지' 했다. 그래서 먼지가 쌓여가는 채로 갖고만 있었다. 그런데 두 주 전 토요일, 네 식구가 오래간만에 맛있는 고기를 먹으러 외출하려던 날, 그 중요한 순간에 녀석이 갑자기 기절해 버렸다. 시동을 거는데 계기판에 불이 깜빡거리더니 몇 초 뒤 아예 꺼져버리는 것 아닌가.


그렇게 몇 주간 세워두었던 차는 막상 필요한 순간에 배터리가 방전되고 말았다. 급히 자동차 보험의 긴급출동 서비스를 불렀고, 짬푸(?)를 띄워(?) 간신히 집 나간 정신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출동한 기사는 배터리 교체를 하라며 십삼만 원을 불렀다. 우선은 그대로 기사님을 돌려보내고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 차를 그냥 세워둘 일이 많을 거 같으면 이참에 정리하는 게 나아. 배터리도 그렇고 차도 안 쓰면 금방 낡는다."


사십여 년 경력의 베테랑 운전자인 아빠의 말씀에 일리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만 그 자리에서 바로 팔아버리자 소리는 안 나왔다. 십 년 된 중고차여도 나름대로 아끼고 애정을 주던 마이카인데 막상 보내려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쓸 일도 많지 않은데 계속 세워만 두다간 이번처럼 금세 배터리가 방전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며칠 뒤 나는 결국 차를 보내주기로 마음먹었다. 뒷좌석에 붙어 있던 카시트를 떼어내고 트렁크와 보조석 짐을 바구니에 담았다. 아이소픽스 결합을 해제하고 카시트를 떼는데 그것을 처음 설치하던 날의 기억이 언뜻 스쳤다. 전남편과 이혼소송 중이던 때였다.


당시 혼자 낯선 타지에서 차로 출퇴근과 아이 등하원을 해내야 했던 나는 급히 은 차를 하나 뽑고 카시트도 좋은 걸로 장만했었다. 운전도 초보인데 세 살 배기를 태워야 되는 상황에 최대한 아이의 안전을 확보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안전성이 입증되었다는 글로벌 브랜드의 제품을 택했는데, 급정거나 충격 시에도 아이의 머리를 보호해 준다는 점이 특히 안심이 되었다. 워낙에도 운전에 겁이 있는 데다 아이를 태우면 평소보다 곱절은 더 조심했다. 그 덕에 아이가 이 카시트에 앉아있던 오 년 여의 시간 동안 다행히도 유럽산 고급 카시트의 성능을 시험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설명서를 읽어보고 안되면 블로그를 찾아 읽었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유튜브 쇼츠를 찾아 한 단계씩 정지해 가며 따라 했다. 그렇게 설치와 높이 조정, 분리까지 혼자 해냈다.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건 오롯이 아이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러 때로는 위험한 행동에 대한 극도의 예민함으로 발현되기도 했다.


"은우야! 안돼! 위험하잖아!!!"


누가 보면 진짜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실은 그러한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게 하리라는 일념으로,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까지 미리 당겨서 조심시켰다. 나는 그런 엄마였다. 은우가 세 살 무렵부터니 아이가 다칠세라 소리 지르고 붙잡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하면서도, 가 다른 부모들보다 한층 더 센서가 예민하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


이를테면 께 걷던 두 아이가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을 때 상대편 엄마는 편안히 보고만 있는데, 나만 반사적으로 '은우야, 위험해! 같이 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쫓고 있었다. 똑같은 상황인데 내가 유난히 아이가 다칠까 봐 불안해하고 못 견뎌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에게 차는 어떤 의미였을까. 어릴 적 교통사고로 오랫동안 그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가, 면허시험에 합격했을 때는 트라우마 극복의 신호탄처럼 다가오기도 했었다. 그러다 결혼 후 전남편이 제멋대로 운전하는 차의 보조석에서 임신한 몸으로 배가 뭉치고 사색이 되었을 때는 보이지 않는 폭력과 공포의 상징이도 했다.


마침내 이혼 결심을 하고 타지에서 아이와 새 삶을 시작하면서 나는 온전히 내 소유로서 자가용이라는 것을 처음 갖게 되었다.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거대한 쇳덩어리에 이름을 지어주고 맛있는(?) 기름도 때맞추어 먹여가며 정을 붙였다. 그렇게 차는 나와 아이의 일상에 꼭 필요한, 늘 함께 하는 가족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세 살 은우를 태우고 공룡 박물관에도 가고, 살 은우를 데리고는 지 축제 현장엘 갔다. 겨우 삼십여 분 거리도 처음에는 어찌나 긴장이 되던지 도착하면 등판이 땀으로 축축했다.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고 그래도 무사히 왔다는 성취감으로 가슴이 웅장해지기도 했다.


"은우야, 엄마가 해냈어! 엄마 운전 잘하지? 멋지지?"


철없는 초보 드라이버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것만으로 격하게 감격한 나머지 아들에게 연신 물어댔다. 그때마다 은우는 '엄마 최고!' 하며 쪼그만 손가락으로 열심히 엄지 척을 해주었다. 도착과 동시에 지쳐버리는 엄마의 저질체력 탓에 실컷 놀지도 못하고 집에 와야 했지만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즐거웠던 것 같다.


그렇게 이혼 후 가장으로 홀로서기까지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차는 나와 아이의 삶을 말없이 바라보며 듬직하게 자리를 지주었다. 모두 잠든 캄캄한 밤에도 집 앞에 떡하니 서서 우리 두 모자를 지켜준 초(!) 대형견 같은 느낌도 있었다. 내 차를 운전하면서 자신의 삶은 남편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라도 운전대를 그냥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진리를 배운 것 같다. 그리고 한 아이의 부모로서 인생이라는 도로 위 순간순간의 선택이 우리의 삶에 그대로 직결되는구나 하는 책임감도 느꼈다.


그렇게 내 삶의 주인이자 당당한 싱글맘으로 홀로서기를 묵묵히 도와준 덩치 큰 조력자를 나는 이제 보내주기로 했다. 보내는 마음이 서운함보다 후련함으로 다가온다. 오 년 동안 나는 나로서 그만큼 단단해졌고, 엄마로서도 쉽지 않았지만 치열하게 살아냈다. 이제 더 이상 차가 두렵지 않다. 혼자 짊어져야 하는 육아의 무게도 예전만큼 버겁지 않게 되었다. 비로소 현재의 삶에 적응한 것이다.


이제 차가 없어도 된다는 것은 혼자서 아이를 태우고 운전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으로 왔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렇게 원가족이 있는 익숙한 곳으로 돌아와서 참 다행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노라고 오 년 간 타지에서 참 진짜 지독히도 고생했다. 오랜만에 가슴 앞에 두 손을 크로스하고 어깨를 토닥토닥해주고 싶다. 내 가장 힘겨웠던 그러나 소중했던 시절을 함께한 마이카, 거의 육아 동지였던 녀석과의 헤어짐의 시간이다. 뜨거웠던 전우애를 가슴속에 간직하고 이제 내 차를 기억 속으로 보내준다.


'수고 많았다, 차야. 그 동안 정말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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