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레깅스 경험
필라테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 몸선을 따라 밀착되어 있는 레깅스가 그것이다. 정면과 후면, 측면까지 어디 하나 체형을 가려주지 않고 적나라하게 달라붙는 얇고 탄성이 뛰어난 기능성 쫄바지랄까.
이 레깅스라는 녀석을 처음 입어본 건 첫 출산을 하고 회복하던 2018년 가을쯤이었다. 아이도 나왔고 양수도 나왔는데 이상하게 임신 기간 동안 찐 이십 킬로그램 중 절반은 그대로 나와 함께였다. 벌어진 골반과 느슨해진 관절 사이의 틈을 살과 붓기가 채우면서 이제 이 무게를 내 몸무게로 받아들여야 하나 싶었다.
같은 키에 뼈와 관절은 약해졌는데 체중이 십 킬로그램이나 불어났으니 어땠겠는가. 발목부터 무릎, 허리, 목까지 온몸이 삐걱대고 아프기 시작했다. 산후풍으로 오랜 기간 고생한 엄마의 말씀에 겁도 났다.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었다.
나는 근처에 사는 출산 동기(?)와 산후 필라테스를 등록했다. 준비물은 레깅스와 미끄럼방지 양말이었다. 그렇게 태어나 처음으로 레깅스라는 고급스러운 이름의 외국 쫄바지를 영접하게 된 것이었다.
처음 배송받은 검은색 레깅스는 너무 작아 보여서 내 튼실한 두 다리를 넣을 수 있을까 적잖이 의심스러웠다. 동봉된 종이에 레깅스 입는 방법이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지침에 따라 한 발씩 조심스레 끼워 넣은 다음 한 번에 확 잡아당기지 않고 조금씩 올려 입는 데 성공했다.
놀랍게도 이 외국산 고급 쫄바지는 제법 두꺼운 조직감에도 불구하고 몸의 부피에 따라 부드럽게 늘어났고, 다리와 엉덩이, 복부를 탄탄하게 잡아주면서도 몸을 과하게 압박하지 않았다. 막상 입고 보니 너무 편했다. 신이 나 거울 앞에 섰다. 그런데 보기는 편하지 않았다.
임산부복 치마에 가려왔던 하체의 라인이 그렇게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특히 양옆으로 비집고 나온 옆구리와 둔부의 살들은 레깅스의 탄성에도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잘 숨겨진 것 같았던 아랫배는 가벼운 스트레칭 한 번에 레깅스 앞부분을 뒤집어 '나 여기 있지롱' 하고 흘러내리며 메롱하듯 튀어나와 내 속까지 뒤집어버렸다.
속이 상했다. 하지만 필라테스를 하기로 한 이상 레깅스는 기본값이었다. 수영장에서는 수영복이 정장인 것과 같았다. 결국 엉덩이를 충분히 덮는 긴 티셔츠를 입는 것으로 대충 타협을 했다. 그렇게 운동하는 날마다 레깅스와의 밀접한 스킨십이 시작되었다.
매트 위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골반 스트레칭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가운데를 향하곤 했다. 사 킬로그램에 육박하는 아이를 자연분만 하노라고 말로 못할 고생을 한 내 몸의 일부인데, 그 시절의 나는 스스로의 몸을 사랑해주지 않았다. 가꾸고 돌보기는커녕 미워했다. 원래도 하체비만형인데 출산으로 인해 더 커진 둔부와 아랫도리가 다 싫고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싶기까지 했다.
수년이 지나 2025년이 되었다. 나는 다시 필라테스를 시작하며 레깅스를 꺼내 입었다. 불어났던 십여 킬로는 서서히 빠져나가 임신 전 몸무게에 근접했다. 아이도 훌쩍 자랐다. 칠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레깅스 입은 몸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조금 달라졌다.
예전보다 더 딱 달라붙는 레깅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 여자를 가만히 쳐다본다. 눈길 가는 대로 따라가며 내 몸 곳곳을 바라본다. 몸은 여전히 불균형하고 불완전하며 아름답지 않다. 상체는 왜소한데 하체는 우람하다. 어깨는 앞으로 굽고 허리와 골반은 뒤로 빠져 있는 식이다.
그렇지만 레깅스가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내 몸의 선을 바라보는 일이 예전만큼 거북스럽지는 않다. 세상과 스스로가 만들었던 이상적인 기준에 한참 못 미쳐도, 그냥 이 모습이 나라는 사람의 지금 모습임을 받아들인다. 어떤 판단이나 평가도 없이. 그 덕분일까. 마음이 평온하다. 괴로움이 일지 않는다.
이런 생각도 든다.
'애초에 필라테스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이 레깅스라는 녀석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굳이 내 몸 구석구석을 커다란 거울 앞에서 주기적으로 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계속 스스로의 몸을 혐오하거나 아예 보지 않고 회피해 버렸을 공산이 크다.
큰 천으로 덮어 가려야 하는 낡고 오래된 집구석 잡동사니처럼 여기저기 튀어나온 몸뚱이를 길고 커다란 옷으로 철저히 가리려고 애썼을 것이다. 치워 버리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하고, 제대로 가꾸어줄 생각은 해보지도 않은 채, 볼 때마다 스스로를 한심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학대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고 믿는다. 마흔, 아니 쉰이나 예순부터라도 그냥 자기 몸을 좀 사랑해 주면 어떨까. 나를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거다. 밖으로 드러난 모습부터 안에 담긴 영혼까지. 결국 이 모든 것이 나를 구성하는 것일 테니까. 이제부터 운동을 통해 스스로를 제대로 가꾸어 보는 거다.
지금껏 아이들을 정성 들여 돌보았듯이
베란다 작은 정원을 세심하게 가꾸었듯이
이제는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만져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