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한 장 담겨있는 그림과 짧은 글 안에 무궁무진한 이야기거리가 들어있다. 아이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그림책이 이제는 어른들에게도 깊은 울림과 감동을 준다. 올해 2025년, ‘그림책의 해’를 맞이하여, 경기도 곳곳에서 그림책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네 개의 독서동아리— ‘환타’, ‘파랑의 순간’, ‘한울소리’, ‘오열종종’—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림책을 읽고 나누며, 개인의 삶과 지역사회에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독서동아리를 보고 있으니, 그림책 한 권이 얼마나 멀리, 얼마나 깊이 닿을 수 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 이들의 모임은 단순한 독서 이상으로, 관계를 잇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는 작은 실천의 도구였다. 이번 기획에서는 그 활동을 글로도, 영상으로도 소개한다.
<‘문화 다양성’이라는 주제를 갖고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는 ‘환타’>
‘환타’는 ‘환상적인 타인’의 줄임말이다. 낯선 타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낯섦을 환상처럼 소중히 여기자는 마음으로 5년째 모이고 있는 그림책 동아리다. 코로나 시기에도 방역 수칙을 지키며 꾸준히 만나온 이들은 지금 여덟 명으로 구성되어있다. 매달 두 번, 문화다양성을 담은 그림책과 일반 도서를 번갈아 읽으며 세상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모임은 늘 느슨하고 자유롭다. 누군가 두세 권의 그림책을 들고 와서 큰 소리로 읽어주면, 다른 회원들은 그림을 감상하며 낭독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정해진 순서도, 정답도 없다. 같은 책을 두고도 열 명이 넘는 목소리가 나오고, 때로는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래도 분위기는 언제나 안전하다. “다름을 말해도 괜찮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그림책’을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글이 짧고 그림이 풍부해서 부담이 없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함께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 권 안에 담긴 메시지가 강렬하면서도 해석의 문이 활짝 열려 있어, 고정관념을 부수는 데 딱이었다. 회원들은 입을 모은다. “문화다양성은 토론으로만 다루기엔 너무 민감하고 복잡한데, 그림책은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져준다”고.
환타는 단순히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림책 목록을 개발하고, 기회가 닿는 대로 현장에 나가 아이들과 어른들을 만난다. 아파트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는 회원도 있어, 동네에서 자연스럽게 연대가 이어진다.
회원들에게 ‘환타’는 이미 삶의 일부가 됐다. 예민해졌지만 오히려 평화로워졌다고 말하며, 내가 뱉는 말 한마디가 혹 편견이나 차별을 담고 있지는 않을까 경계하며 단어 선택이 조심스러워졌다고 한다. “다름을 틀림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안고 그들은 계속해서 나아간다. 장벽 없는 소통의 장, 누구나 마음만 있으면 들어올 수 있는 곳, 문화다양성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되는 곳으로 만들어가는 ‘환타’의 앞날을 응원하게 된다.
<어른의 시선과 감성으로 그림책을 읽고 팟캐스트로 책을 소개하는 ‘파랑의 순간’>
군포시의 한 녹음실에서 매달 한 번, 나이도 직업도 제각각이지만 그림책을 좋아한다는 한 가지 공통점으로 모인 회원들이 있다.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일상의 작은 쉼이 되기를 바라며, ‘파랑의 순간’은 8명의 회원이 함께 모여 4년째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단순히 책을 읽고 끝내지 않는다. 책을 읽고, 그림을 뜯어보고, 판형과 제본까지 만지작거리며 분석한다. 글은 짧지만 행간에 숨겨진 삶의 성찰이 깊어서, 어른의 눈으로 읽을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글과 그림이 만들어내는 조화, 짧은 내용이 지닌 상징과 은유가 다른 어떤 종류의 책보다 다양하고, 철학적인 요소까지 함축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한 작품 한 작품 너무나 아름다운 미술관에 온 듯한 예술성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함께 나눈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그림책 전문 팟캐스트’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그림책을 소개하며 때로는 시민패널과 함께 풍성하게 팟캐스트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경기마을미디어공모전에서 3년 연속 우수상을 받으며 함께 기뻐했던 순간이 이들에게는 정말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러한 응원을 원동력 삼아 현재는 그림책을 독립출판물로 발간도 하며 공공도서관에서 그림책 연계 자원봉사도 이어가고 있다.
오늘도 ‘파랑의 순간’은 함께 모여 그림책을 펼친다. 종이 넘기는 소리와 공감과 감탄의 목소리가 녹음실의 마이크를 통해 전파를 타고, 또 누군가의 하루를 조용히 빛나게 만든다.
<그림책 낭독 봉사를 통해 독서 경험을 나누는 ‘한울소리’>
‘한울소리’는 ‘한울도서관에서 함께 소리 내다’, ‘온 세상에서 소리 내다’라는 뜻을 담아 지어진 이름이다. 파주시의 유일한 장애 특화 도서관인 한울도서관에서 3년 전 진행한 낭독 특강 <세상은 귀를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를 들은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뜻을 모아, 그 해 바로 정식으로 동아리를 결성하여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회원들은 분기별로 한 권의 책을 정하고, 매월 격주 화요일, 윤독 모임을 가지며, 독서와 낭독 훈련을 함께하고 있다. 회원 한 명이 대표로 자신이 골라온 그림책을 낭독하며, 다른 회원들은 조용히 감상하며 그 시간을 즐긴다.
“낭독은 묵독보다 천천히, 저자나 주인공에 더 깊이 감정이입 할 수 있어요. 같은 책을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들으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과 표현을 만날 수 있어서 한 권을 읽어도 여러 번 읽은 것처럼 풍성합니다.”
작년부터 회원들은 파주시 ‘아름다운 요양원’에서 그림책 낭독 봉사를 하며 지역사회에도 선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회원들도 처음 봉사를 나갔을 때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지만, 회원들과 함께 연습하고 서로 응원하다 보니 조금씩 자신감이 붙고, 우리들의 목소리가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이윤아 사서(한울도서관 동아리 업무 담당)는 “재능과 노력을 베푸는 것도 좋지만, 먼저 회원들 스스로가 책과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과 세상을 발견하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 바탕 위에서 자연스럽게 타인을 위한 봉사로 이어지면 더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갖고 열과 성을 다해 동아리 활동을 지지해주고 있다.
오늘도 한울도서관에서 열여덟 명의 목소리가 힘차게 모인다. 그림책 한 권을 펼치고, 숨을 고르고, 소리 내어 읽는다. 그리고 이들의 작은 목소리 하나 하나가 지역사회에 따뜻한 연결을 만든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부부들이 함게 모여 이야기 나누는 ‘오열종종’>
‘오열종종’은 다섯 쌍의 부부, 총 열 명이 종종 모여 함께 책을 읽는다는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동네에서 10년 넘게 책 모임을 해오던 아내들이 남편에게 함께 책을 읽자며 그들의 손을 잡아끌어 시작된 모임이다. 처음에는 독서모임을 해본적이 없던 남편들이 많이 어색해했지만, 이제는 그들도 함께하는 이 모임이 기다려진다고 말한다.
운영방식은 단순하다. 돌아가면서 서로의 집에서 모여 그림책을 소개하고 낭독을 통해 함께 그림책을 읽는다. 인상 깊은 장면을 다시 펼쳐 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적어 나누기도 한다. 규칙은 없다. 그저 편안하게 읽고, 듣고, 이야기하면 된다. 책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는 즐거운 식사시간도 빼놓을 수 없다.
부부가 함께 그림책을 읽는 가장 큰 장점은 평소 하지 않던 대화가 시작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아이, 돈, 집안일 얘기가 아닌,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서로의 마음을 공적인 자리에서 편안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대화 소재가 풍성해졌어요. 다른 부부들이 책을 통해 하는 이야기도 듣고 나면, 우리만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지는 느낌입니다.”
가족 독서를 망설이는 부부들에게 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다.
“문해력이나 독서력을 증진시키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더 자유롭고 재미있는 책 모임을 진행하실 수 있을 거예요. 부부 간 대화 소재가 풍성해진다는 것도 참 좋습니다”
인터뷰 진행 일자 :
환타 2025년 9월 8일(월)
파랑의 순간 2025년 9월 19일(금)
한울소리 2025년 9월 23일(화)
오열종종 2025년 9월 27일(토)
인터뷰 진행 :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인터뷰 촬영 : 코끼리픽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