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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멘 Dec 25. 2021

드뷔시의 ⟪달빛⟫, 현실과 예술의 경계

여행 마지막 날에 밤하늘을 보니 달이 아름다웠더라





⟪달빛⟫은 프랑스의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가 1890년에 작곡한 피아노 독주곡이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 작품이다. 학업으로 피로할 때 나는 산책을 나가 밤하늘 밑에서 ⟪달빛⟫을 듣곤 한다. 고요 속에서 ⟪달빛⟫의 첫 세 음을 듣는 순간 나는 지상의 세계에서 두둥실 떠올라 아름다운 밤하늘 품에 안기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단3도, 길게 울려 퍼지는 한 옥타브 위의 단3도, 그리고 살짝의 여운과 함께 울리는 장3도. 드뷔시는 단 세 개의 음만으로 깨끗한 밤하늘 속에서 은은히 빛나는 달을 그려낸다.





⟪달빛⟫을 사랑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달빛⟫은 유튜브에서 무려 3천 7백 만 회의 조회수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명곡이다. 영화 ⟪트와일라잇⟫, ⟪오션스 일레븐⟫, 그리고 애니메이션 ⟪4월은 너의 거짓말⟫ 등 수많은 미디어에서도 ⟪달빛⟫을 사용하였다.


나는 딱 두 개의 곡만 알고 있다. 하나는 ⟪달빛⟫이고 하나는 ⟪달빛⟫이 아니다.    _빅터 보르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달빛⟫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마 ⟪달빛⟫이 불러일으키는 묘한 감정 때문일 것이다. ⟪달빛⟫의 주제는 달빛의 따뜻함이자 밤의 외로움이다. 때문에 ⟪달빛⟫은 슬픈 음악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쁜 음악도 아니다. ⟪달빛⟫은 슬픔과 기쁨 사이의 감정을 어루만지는 음악이다. 그 감정은 마치 꿈만 같았던 여행 이후 귀국하는 비행기에 탑승할 때의 감정이자, 어렸을 때 다녔던 초등학교에서 내가 앉던 자리를 발견할 때의 감정이다.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우리는 기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기에 마음 한 켠에는 슬픔이 함께 베인다. 바로 이 슬픔과 행복의 조화가 ⟪달빛⟫이 전하는 감정이다.


 이러한 달빛 특징은 드뷔시가 의도한 것이다. 드뷔시는 자신의 달빛 베를렌이라는 시인의 동명의 작품 달빛에서 악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밝혔다. 베를렌의 달빛 달빛 밑에서의 무도회를 그린 시이며, 어두운 시어와 밝은 시어의 조화가 특징이다. 시는 다음과 같은 단락으로 끝난다.


고요한 달빛,  슬프고 아름다운 ,
나뭇가지 위의 새들을 꿈의 나라로 보내고
분수가 황홀경에 눈물 흘리도록 만드는 .
대리석상 사이에  있는 길고 가냘픈 분수를.


베를렌의 특징적인 어둠과 빛의 조화를 음악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드뷔시는 ⟪달빛⟫을 치밀한 구조로 설계하였다. 앞서 ⟪달빛⟫의 첫 두 음이 단3도라고 언급하였다. 구체적으로는 파와 라♭으로 이루어진 바단3도이다. 바단3도는 어두운 느낌을 주는 단화음(파-라♭-도)의 두 음일 수도 있고, 밝은 느낌을 주는 장화음(레♭-파-라♭)의 두 음일 수도 있다. 두 경우 중 어떤 경우인지는 해당 곡이 바단조를 사용하는지, 라♭장조를 사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달빛⟫은 특정 조를 염두에 두고 쓰인 곡이 아니다. 드뷔시는 ⟪달빛⟫이 다채로운 단조와 장조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도록 설계하였다. 이와 같은 조성의 불확실성 덕분에 ⟪달빛⟫의 화음은 어둠과 빛 사이의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드뷔시의 치밀한 설계는 도입부의 테마가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지점인 59마디에서 정수를 이룬다. 순전히 바단3도로만 되어 있던 도입부와는 달리, 59마디에서 드뷔시는 바단3도에 도♭을 살포시 끼워넣어 불협화음을 만든다. 이 불협화음은 곡이 종결부에 이르렀다는 신호로서, 마치 다크 초콜렛의 쌉쌀한 끝맛과 같은 역할을 한다. 59마디의 도♭은 드뷔시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다. 이제 밤하늘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지상의 세계로 돌아갈 시간이라고.


예술을 감상하는 순간 우리는 일상과 단절된 시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 시공간에는 걱정도, 괴로움도, 스트레스도 없다. 오직 풍부한 색채만이 있다. 그러나 예술은 결코 현실의 도피처가 될 수 없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마법의 시공간은 사라지고, 관객들은 다시 시민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달빛⟫의 종결부가 유독 쓸쓸한 이유는 예술의 이러한 한계가 뚜렷이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비록 예술의 시공간이 잠시 열렸다 닫히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 달곰씁쓸한 추억을 회상하고, 눈물을 흘리며, 따뜻한 위로를 받는다. 예술은 대피소가 될 수는 없지만, 포근한 쉼터가 될 수는 있다. 그리고 드뷔시의 ⟪달빛⟫이 받고 있는 세계적인 사랑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달빛⟫에서 삶의 쉼터를 찾았다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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