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디멘 Sep 21. 2022

의미 없음의 아름다움

로렘 입숨, 비트겐슈타인, 실존주의, 다다이즘, 외젠 아제

Lorem ipsum dolor sit amet, consectetur adipiscing elit.


혹시 이 문장을 접한 적이 있나요? 로렘 입숨이라고 불리는 이 문장은 조판업자나 디자이너가 샘플 텍스트로 가장 자주 사용하는 문장입니다. 디자인 포트폴리오나 파워포인트 템플릿 같은 곳에서 종종 볼 수 있죠. 로렘 입숨이 널리 쓰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중세의 조판업자들은 출판물의 완성도를 검토해야 하는 감수자들이 종종 샘플 텍스트로 적힌 이야기를 읽는 데 정신이 팔린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렇다고 샘플 텍스트로 '가가가가’와 같은 문자열을 쓰자니 보기에 너무 거슬렀죠.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16세기, 한 미상의 출판업자가 키케로의 글을 짜깁기하여 아무 의미도 없지만 보기에는 예쁜 더미 텍스트를 제작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의미를 결여하는 작업은 우리의 흥미를 자극합니다. 언어의 일반적인 목적은 의미의 전달이기에 의미를 결여한 문장은 보는 사람에게 역설적인 호기심을 일으키죠. 로렘 입숨처럼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어휘로 구성되었기에 의미가 없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어휘는 모두 올바르지만 구조가 어긋났기 때문에 의미가 없는 문장도 있습니다. “Finished the John has work”와 같은 문장이 그런 사례겠죠. 마지막으로 어휘와 문법이 모두 올바르지만 의미가 결여된 문장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가 제시한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무색의 초록색 생각들이 격렬히 잠을 잔다)”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문장이 어떻게 의미를 획득하는지, 의미 없는 문장은 어떤 경우 발생하는지에 관한 논의는 20세기에 이르러 철학의 핵심 주제로 급부상했습니다. 이러한 ‘언어적 전회’에 누구보다도 크게 기여한 인물은 바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입니다. 그의 대표 저서인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수수께끼 같은 문장들로 악명 높은 이 저서는 다음 7개의 대명제와 이에 대한 보충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세계는 성립할 수 있는 경우들의 총체이다.

2. 사실, 즉 실제로 성립한 경우는 원자사실들의 존재 여부로 결정된다.

3.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 사고이다.

4. 사고는 의미 있는 명제이다.

5. 명제는 요소명제들의 진리함수이다.

6. 진리함수의 일반 형식은 [p, ξ, N(ξ)]이다. 이것이 명제의 일반 형식이다.

7.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3번 명제와 4번 명제, 그리고 7번 명제에만 집중하면 충분합니다. 먼저 3번 명제는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유명한 그림 이론을 피력하는 지점입니다. 그림 이론에 따르면 언어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이유는 명제가 세계의 특정 사태를 마치 그림처럼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양이가 상자 안에 있다”라는 명제는, 고양이가 상자 안에 있는 사태와 마치 정물화와 사과처럼 대응함으로써 의미를 획득합니다. 그리고 4번 명제에 따르면, 세계의 특정 사태를 그림처럼 그려내는 명제만이 의미 있는 명제입니다. 앞서 살펴본 “Colorless green ideas sleep furiously”는 어떠한 세계의 사태도 그려내지 않기에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당연한 이야기 아니냐고요?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모든 문제가 이토록 간단한 언어의 본질을 망각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지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사람들은 매우 자주 언어를 남용합니다. 그중에서도 철학자들이 특히 심각하죠. 일례로 많은 철학자는 시간이 존재하느냐를 두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아우구스투스는 종교적 시간관을 피력했으며,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라는 개념을 토대로 ‘순수 지속’의 시간론을 개진했죠.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같은 형이상학적 논의는 의미를 결여한 문장들의 난장판일 뿐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얼음이 차갑다’, 또는 ‘물이 차갑지 않다’에 대응하는 사태를 각각 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차가움이 존재한다’에 대응하는 사태는 그릴 수 없습니다. ‘차가움’은 어떤 대상이 지닐 수 있는 속성일 뿐, 대상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과거의 사건이다”라는 문장에서 ‘프랑스 혁명’은 ‘과거의 사건임’이라는 속성을 가집니다. 그렇다고 ‘과거’가 실제로 존재하냐고 묻는 것은 ‘차가움’이 실제로 존재하냐고 묻는 것만큼이나 난센스입니다.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마치 무색의 초록색 생각이 격렬히 자고 있느냐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자꾸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선이란 무엇인지, 신이 존재하는지, 삶의 의미란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을 언어로써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프로젝트는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 등의 이름으로 학문화되었죠. 그러나 언어가 그려내는 세계에는 경계가 있고, 그 경계를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선천적 시각장애인은 색깔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색깔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그 어떤 선천적 시각장애인도 색채 인식에 관한 이론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합니다”.


비트겐슈타인 언어철학의 파급력은 대단했습니다. 마침 ⟪논리철학논고⟫가 출판된 20세기 초는 눈부신 과학 발전에 경도된 지식인들이 경험주의를 신봉하던 시대였습니다. 과학적 계몽주의에 공감한 일군의 학자들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지식인 서클을 구성하였고, 이 서클에는 비엔나 서클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모리츠 슐리크가 주도한 이 서클에는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한 괴델과, 과학철학적 업적으로 유명한 포퍼를 비롯하여 카르납, 타르스키, 램지, 콰인 등 수많은 거장이 오갔습니다. 이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바이블로 삼아 논리실증주의라고 불릴 그들만의 철학적 입장을 구성했습니다. 논리실증주의의 핵심 목표는 학문의 세계를 검증 가능하고 간결한 언어로만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학문의 세계에서 인문철학, 윤리학, 미학을 추방하고 수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심리학과 같은 학문만을 남기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비엔나 서클이 바란 학문의 세계는, 의미로만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미는 지루하지 않나요?


“고양이가 상자 안에 있다”. “사과는 둥글고 빨갛다”. “물은 100°C에서 끓는다”. 모두 논리실증주의자가 의미 있다고 인정할 명제들입니다. 그러나 이 명제들이 재밌다거나, 아름답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재미있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은 언어에는 의미가 가득할지언정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이를 의식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와 관련하여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업적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적힌 것과 여기에 적히지 않은 것.
바로 두 번째 부분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실증주의에 수긍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윤리학과 미학의 명제는 의미가 없기에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과 미학의 명제는 언어로 그려질 수 없기에 각자의 삶에서 실천, 체험, 그리고 사색을 통해 드러나야 하며, 이런 활동이야말로 삶의 가장 가치 있는 측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윤리학과 미학은 하나다.”


이런 면에서 에이시믹 글쓰기라는 예술 장르는 비트겐슈타인적 의미에서 진정 가치 있는 글쓰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이시믹이라는 단어는 ‘의미적’이라는 뜻의 semic에 ‘없음’을 뜻하는 접두사 ‘a-‘가 붙은 단어입니다. 즉, 에이시믹 글쓰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호와 문양으로 ‘글’을 쓰는 행위입니다. 넓게 보자면 로렘 입숨도 에이시믹 글쓰기라고 할 수 있지만 보통 에이시믹 글쓰기는 로렘 입숨보다 더 적극적으로 불가해함과 무의미를 추구합니다. 예를 들어 이 작품을 보세요.



이 작품은 타티나 루멜리오티의 에이시믹 작품입니다. 문자로 보이는 것이 마구 적혀있지만 실존하는 문자는 아닙니다.  이 작품에는 어떤 내재적인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의미의 공백은 곧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이 아닌가요? 이미 완성된 그림에는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지만, 백지에는 아무나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에이시믹 글쓰기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는 바로 그 점에서 무한한 의미를 획득합니다. 의미는 관람자의 ‘삶의 형식(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S.23)’이 작품과 공명하는 순간 형성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작품을 통해 무한한 우주의 신비를 체험하는 한편, 어떤 사람은 우연으로 가득한 삶의 변화무쌍함을 떠올리겠죠. 불가해한 작품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고, 작품의 미적 측면에 그저 감탄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어린아이, 예술가, 직장인, 물리학자, 목사, 낙관론자, 비관론자, 학생, 임산부, 그리고 죽음을 앞둔 노인이 이 작품을 읽는 방식은 모두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에이시믹 글쓰기는 그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한 언어의 경계 너머를 드러내 주는 체험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글쓰기의 목적이라면, 어쩌면 에이시믹 글쓰기는 이 목적을 가장 잘 달성한 문학 장르일지도 모릅니다. 들여다볼수록 이 세계는 의미로 가득한 동산이 아닌 무의미로 방치된 벌판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의미의 동산에서 무의미의 벌판으로 내쫓겼다고나 할까요.


근현대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인류는 의미의 동산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모든 삶에는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신에 의해서 이 세계로 소환되었고, 그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겠노라 생각했죠. 저 학교의 선생은 인류의 이성을 함양시키기 위해, 저 술집의 주인은 인류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신에 의해서 심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가치관에서 삶을 하나의 책으로 보는 비유가 탄생했고요.


개인사뿐만 아니라 세계사 또한 어떤 거대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문명의 탄생, 계급의 발생, 제국의 성립, 시민 혁명, 산업화. 모든 세계사적 사건을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이 헤쳐나가는 역경인 양 받아들였습니다. 숭고한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하는 사건이었던 것이죠. 세계사의 거대한 목적이 과연 무엇일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달랐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은 세계사가 보편적 인류애의 실현을 향해 나아간다고 보았고, 헤겔주의자들은 이성의 궁극적 발현을 향해 나아간다고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든 형태의 계급 구분이 사라진 사회를 향해 나아간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세계사는 궁극의 목적지로 향하는 발걸음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하지만 두 번에 거친 세계 대전은 이 모든 가치관을 산산조각냈습니다. 세계 대전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진실을 가차 없이 드러냈습니다. 인간은 기독교에서 생각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존재도 아니고, 헤겔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성적 존재도 아니고,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특정 계급에 속한 역할극 배우도 아닙니다. 나라는 인간은 그저 지금, 여기, 나로서 존재하는 주체, 그뿐입니다.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실이 전쟁을 거치며 가차 없이 드러났습니다.


해변가의 소라를 상상해 보세요. 만일 누군가 “이 소라는 해변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 여기에 있다”라고 말한다면, 또는 “이 소라는 소라게의 집으로 쓰이기 위해 여기에 있다”라고 말한다면, 또는 “이 소라는 먹거리로 요리되기 위해 여기에 있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아니다, 이 소라는 그저 여기에 존재할 뿐이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물론 소라는 해변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소라게의 집으로 쓰이기도 하고, 먹거리로 요리되기도 합니다. 소라에게 갖다 붙일 수 있는 의미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죠. 그러나 누군가 갖다 붙였을 뿐인 의미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뒤통수를 맞을 위험에 노출됩니다. 가령 소라의 의미는 바다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지나치게 번식해 버린 소라로 흉측하게 썩어가는 해변을 마주하고는 경악할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소라가 이럴 수가 있지!”라고 소리치면서요. 그러나 어쩌겠어요. 애초부터 소라의 의미는 바다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었는걸요.


소라뿐이 아닙니다. 세계 자체가 무심합니다. 이 세계에서는 권선징악의 정의가 실현되지도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세계가 앞으로 나아지리라는 확신조차 얻을 수 없죠. 무의미한 세계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노력은 적에게 뒤통수를 드러내는 행위와 다를 바 없습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식인들은 과학과 이성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에 도취해 앞으로 인류사에 남은 것은 영원한 진보밖에 없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세계 대전은 그들의 뒤통수를 보기 좋게 후려쳤죠. 그들 눈앞으로 썩어 문드러지는 소라로 가득한 바다가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은 불합리에 얼굴을 맞대고 선다.
그는 그의 가슴 속에서 행복과 이유를 향한 갈망을 느낀다.
부조리는 인간의 필요와 불합리한 세계의 적막이 마주할 때 탄생한다.

_알베르 카뮈


이러한 세계의 무심함에 가장 먼저 눈을 뜬 사람들은 예술가였습니다. 이 세계가 무의미와 부조리로 가득한 곳이라면, 예술은 응당 세계의 그러한 측면을 드러내야 하겠죠.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취리히의 한 카페에서 젊은 예술가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전통적 체제, 논리, 이성을 거부하고 세계의 무의미함으로 기꺼이 몸을 던지고자 하는 자들이었죠. 한 예술가가 책상에 놓여 있던 사전을 집어들고는 나이프를 꽂았습니다. 나이프는 프랑스어로 장난감 말을 의미하는 ‘다다’라는 단어에 꽂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예술 운동은 다다이즘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다다이즘 작품에서는 의미를 찾기 힘듭니다. 오히려 의미를 찾으려는 관람자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죠. 유명한 다다이즘 예술가 장 아르프의 작품, <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된 시각형 콜라주>는 자연스럽게 찢어진 채색된 종이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서 만든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어떤가요? 만 레이라는 예술가가 제작한 이 작품의 이름은 <선물>입니다. 실제로 레이는 이 작품을  자신의 친구였던 작곡가 에릭 사티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하네요. <선물>에 대한 테이트 미술관의 큐레이션을 들어 볼까요.



[<선물>은] 평범한 가정의 삶을 기이하고 이름 붙일 수 없으며 사디스트적인 함축마저 지니고 있는 물건으로 변모시켰다. 이 변모의 과정은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의 대상이 어떻게 논리적 규칙, 그리고 언어와 대상 사이의 관습적 동일화를 탈출하는 힘을 얻는지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레이의 <선물>은 사물화된 무의미입니다. 동시에 이 작품은 불가해로부터 비롯되는 공포감, 그리고 일상의 베일 밑에서 꿈틀거리는 부조리를 마주할 때의 불안감을 일으키죠. 이것은 다다이즘의 특징입니다. 다다이즘의 목표는 세계의 무의미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무의미함이 불러일으키는 공포, 익살스러움, 그리고 부조리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다다이즘 운동의 아이콘은 뒤샹의 <샘>입니다. <샘>은 대량생산된 남성용 소변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곰곰이 보면 남성용 소변기에는 미적이라고 부를 측면이 다분히 있습니다. 좌우 대칭적으로 우아하게 굽이치는 곡선의 미, 때 묻지 않은 백색의 단순함, 부드럽게 들어간 내부의 공간. 남성용 소변기라는 개념을 잊고 본다면 소변기는 예술 작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한 뒤샹은 남성용 소변기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해당 조형물을 ‘소변기’라는 본래의 의미로부터 해방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뒤샹의 <샘>을 보면 로렘 입숨이 떠오르곤 합니다. 로렘 입숨이 의미의 전달이라는 언어의 본래 의미에서 해방되어 미적 가치만을 지니는 텍스트가 되었듯이, 뒤샹의 <샘>은 남성용 소변기라는 본래 의미에서 해방되어 예술품이 되었습니다. 의미를 담보로 조형물은 아름다움을 얻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이야말로 무의미의 무기력감을 이겨 내는 무기가 아닐까요?


뒤샹이 창안한 레디메이드 예술, 즉 기성품의 예술은 명실상부 현대 예술의 아이콘이지만, 따지고 보면 레디메이드 예술은 사진술이 발명된 19세기부터 이미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사진술이 막 발명되었을 당시 많은 예술가와 철학자는 사진도 예술로 볼 수 있는가를 두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적잖은 지식인들은 사진은 기계에 의해서 만들어지기에 작가의 의도가 개입할 수 없으므로,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아우라’ 개념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철학자 벤야민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벤야민은 외젠 아제라는 사진가의 작품에 주목했습니다. 아제는 당시의 관행과 달리 사람이 없는 파리 골목의 풍경을 찍었습니다.



이 사진에서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아마 텅 빈 거리에서 엄습하는 외로움과 공허함에 압도되셨을 겁니다.  우리는 도시의 거리를 떠올릴 때 늘 인파로 북적거리는 풍경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아제의 사진 속 거리는 일체의 질서와 혼란을 초월한 채 그저 그곳에 있을 뿐입니다. 아제의 사진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는데요, 가공되지 않은 현실이야말로 가장 비현실적이라는 아이러니가 폭로된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현실이 의미, 질서, 그리고 생명력으로 채워져 있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의미도, 질서도, 생명력도 찾을 수 없는 벌거벗은 현실의 사진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비현실감을 느낍니다. 베냐민은 지적합니다. 사진은 기계에 의해 제작된다. 사진에는 어떠한 의도도 없다. 그렇기에 사진은 예술이 된다.


베냐민의 말대로 현실이 이토록 공허하고 무의미하다면, 현실은 퍽 우울한 장소가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베냐민은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베냐민에게 파리는 전통적인 가치와 의미의 파괴를 몰고 온 파편화된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을 그는 마치 밤하늘의 별 사이를 떠도는 우주인처럼 산책했죠. 어떤 의미도 없이 조각난 채 존재하는 공간에서 베냐민은 무한한 상상의 조합을 발견한 것입니다. 박영욱 교수님께서는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침몰한 해적선의 폐허가 종말과 비극이 아닌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하듯이 과거의 유산을 파편화한 대도시는 그 흔적을 통하여 흥미와 상상력을 자극한다. 상상력이란 단편적인 것들을 나름대로 결합하여 그림을 그리는 데서 나오는 것이지 이미 총체적으로 갖추어진 대상을 인식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거나 탄생하고 다시 사멸하여 흔적을 남기는 이러한 덧없는 과정과 그 폐허의 흔적이야말로 진리인 것이다.”


진리. 어쩌면 그것은 들리는 것만큼 거창한 개념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전갈과 궁수를 그린 목동의 상상력이야말로 철학자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진리일지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 주변은 무의미로 가득합니다. 로렘 입숨도 무의미하고, 격렬히 잠을 자는 초록색 생각들도 무의미하고, 에이시믹 글쓰기도 무의미하고, 소라도 무의미하고, 소변기도 무의미하고, 도시의 골목도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무의미는 아름답습니다. 그것은 순백의 도화지이자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계가 이토록 어린아이다운 곳이라면, 장단을 맞춰 주는 겸 오늘 하루는 말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살아보는 것도 퍽 나쁘지 않겠습니다.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해서가 아니라 그저 풀내음을 맡고 싶다는 이유로 산책하러 나가 보세요. 글솜씨가 없다고 주저하지 말고 아무 이야기나 공책에 끼적여 보세요. 카페에 갔다면 갈색 종이 티슈에 볼펜으로 커피잔을 그려 보세요. 결과물의 완성도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무심한 세계에 부드럽게 마음을 열어젖힌 채 무의미를 가지고 블록 쌓기를 즐길 수 있는 상상력이니까요.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아니, 창조하는 힘을 주는 상상력 말이에요.

작가의 이전글 드뷔시의 ⟪달빛⟫, 현실과 예술의 경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