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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븐클라우드 Jun 03. 2022

나이 들어감과 늙어감의 차이

늙어감에 대하여

  나이 들어가는 것과 늙어가는 것은 다르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어느 시기에나 가능하지만 늙어가는 것은 특정 시기 이후라야 한다. 나이 들어가는 것은 긍정적일 수 있다. 상승 곡선, 나아지는 것도 가능하다. 성장, 성숙. 지식이 많아지고 지혜가 깊어지고 키가 크고 근육이 탄탄해지고 그런. 반면 늙어가는 것은 하강 곡선, 더 나빠지는 것이다. 절정을 지나 쇠락하기 시작한다. 특정 부분에서 시작하여 다른 부분이, 더 많은 부분이 나빠지고 결국 모든 것이 나빠진다. 몸의 이곳저곳 기능이 점점 떨어지고, 친구의 수도 점점 줄어들고, 가족의 수 역시 그러할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위축되고 관계망도 좁아지고, 지금보다 더 건강해지거나 더 예뻐지거나 더 부자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늙음은 필연적으로 죽음, 이별과 맞닿아 있다. 죽음과 이별을 향해 하루하루가, 모든 행적이, 모든 관계가 느리게 하강하는 곡선을 그린다. 때로는 솟아오르고 가끔 반짝하는 순간이 있어도 결국 큰 방향은 일정하다는 것을 안다. 끝은 정해져 있고 벗어날 수 없다. 최종적으로 거기에 맞닿는 순간을 기다릴 수밖에. 끝이 뻔히 보인다는 사실이 고통으로 다가온다. 매일 밤 몰락을 느낀다. 인간의 한계. 인간의 고통이 무엇인지 늙어가며 비로소 알게 된다. 

  차라리 앞질러 가버릴까, 하루하루 느리게 기다리느니 확 달려가 끝을 내버릴까 하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 늙어가기 전의 일이다. 그런 성급한 충동 역시 젊음의 특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늙어갈수록 죽음을 믿지 못한다. 삶보다 죽음이 나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그런 낙관은 불가능하다.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후에, 더한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걸 한 번쯤은 경험한 후다. 최악보다 더한 최악, 끊임없이 갱신되는 절망이 죽음일 수도 있다. 그래서 기다린다.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최후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늙어감을 견디고, 이별과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견디고, 비통함을 견딘다.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에는 그저 기도할 수밖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거다. 기도의 시작은 소망이 아니라 수긍이다. 나는 늙어가고 나는 죽을 것이고 모두와 이별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받아들이며 느끼는 비통함을 견딜 수 없으니 온전히 손바닥을 내밀어 신께 맡긴다. 인간인 저는 답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이유가 있다면, 태어나고 살고 죽어야 하는 과정에 이유가 있다면 알려주소서.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라면 받아들이게 하소서. 그럼으로써 다시 견딜 수 있다. 조금 더 낫게, 조금 더 진정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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