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ndelion May 16. 2023

장소에 대한 기억의 조각 II

남부터미널

4월 말 건강 검진을 하고 실비 보험 청구를 했다. 실비 보험 청구 후 다음날 지급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대장 용종 제거에 대한 진단서를 첨부해서 보내 주면 별도의 보험금이 지급된다고 했다. 병원에 전화해서 진단서를 요청했고 원하는 날짜에 찾으러 오라고 했다. 진단서를 찾으러 가는 길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맥주 회사 건물.. 이 건물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던 20대 초반 대학생이었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내가 기다리던 사람은 맥주 회사에 회계 감사 파견 업무를 하고 있었던 회계사 오빠였다. 그 사람 퇴근 시간에 맞추어 몇 번 그 근처에서 만났었고 밥을 먹었고 예술의 전당 전시회도 같이 갔던 기억이 났다. 


회계사 오빠는 어른들의 소개로 만났었다.  그때 당시 난 아는 언니가 소개해 준 같은 학교 공대에 다니는 오빠를 부모님 몰래 만나고 있었었다.

엄마는 절대로 학교 씨씨 하면 안 된다고 해서 엄마는 내가 만나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고 나도 그때 만나던 그 사람을 엄청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엄마가 선 같은 소개팅을 하라고 했을 때 저항 없이 회계사인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의도된 양다리는 아니었지만 한 달 정도 양다리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두 사람을 다 너무 좋아했던 것도 아니고 친구들도 남자 친구가 있고 나도 그동안 좋아하던 선배들이 있었지만 다 나랑 이어지지도 않았었고 해서 소개팅으로 만난 그 오빠가 나쁘지 않아서 계속 연락하며 만나고 있었다. 그러다 부모님이 만나라고 한 회계사 오빠를 만나서 데이트를 하다 보니 학생인 오빠와 직장인 오빠와의 데이트는 매우 많은 것이 다름을 느껴서 난 학교 씨씨였던 오빠랑 헤어져야겠다 결심하고 정말 말도 안 되는 걸로 시비 걸어 싸우다 헤어졌다. 그리고 회계사인 오빠를 만났다. 회계사 오빠랑 만나면 오빠와 돈 걱정 없는 데이트를 했다. 오빠는 어디 갈지 다 정해서 날 만나러 나왔었고 (밥도 정말 비싸고 맛있는 곳에서 먹었다) 오빠와 처음으로 뮤지컬도 봤었다. 오빠는 옆에서 졸았지만 난 그때 뮤지컬을 처음 접하고  뮤지컬이 너무 좋아서 그 이후부터 뮤지컬 보러 가는 걸 좋아하게 되었다. 


회계사와 만남이 지속될수록 부모님과 친척들은 이 사람과 잘 사귀고 졸업하면 결혼하길 바랐다. (하지만, 난 어른들의 말을 그렇게 잘 듣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직장인을 처음 만난 나는 직장인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데이트할 때 경제적인 면에서는 직장인 오빠를 만나는 게 매우 큰 장점이었지만 대학생인 오빠처럼 전화를 자주 하지도 않았고 매일 볼 수도 없었다. 처음으로 크게 싸우게 된 건,,, 나는 연락이 잘 안 되는 그 오빠 때문에 짜증이 났었다.  한 번은 미팅 중이라며 전화를 확 끊어 버리고 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나 연락온 그 오빠 때문에 매우 화가 났었다. 그래서 난 늦게 연락온 오빠 의 전화를 씹었었다. 그즈음 오빠의 졸업식이 있었다. 조기 취업을 했던 오빠는 졸업식에 나랑 꼭 가길 원했었다. 난 꼭 가겠노라고 오빠랑 약속하고 졸업식에 입고 갈 옷도 사놨었다. 그런데 전화 사건 이후 화가 너무도 많이 났던 난  졸업식 안 간다고 엄포를 놓고 전화를 끊었었다. 야근을 하고 있던 오빠는 꽃다발을 사가지고 집 앞에 찾아왔었다. 꽃다발을 보고 화가 풀려서 나는 새 옷 새 신발을 신고 졸업식에 갔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렸다. 회사에서 일하다가 보면 정신이 없을 땐 핸드폰을 볼 시간도 없이 바쁘게 일할 때도 많은데… 이십 대 초반 뭘 알았을까???-


오빠 졸업식에는 오빠 부모님과 동생, 친척분도 오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빠의 가족들과 밥을 먹고 학교 친구들과 차도 마시고 인사를 했었다. 부모님께 친구들에게 여자 친구라고 인사를 했었다. 그리고 오빠의 졸업식 모든 사진에 난 함께 했다. 그 사람은 아직 그 졸업식 사진을 가지고 있을까? 난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사람의 졸업식 사진..... 


그 졸업식을 다녀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오빠랑 헤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잘 헤어진 것 같다. 난 직장인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당시 난 특별한 꿈도 없었다. 만날 당시 오빠는 나에게 졸업 후 무슨 일 하고 싶냐 종종 물었었다. 오빠의 질문에 난 글쎄라고 답을 하곤 했다… 오빠는 나의 대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다. 어느 날 오빠는 결국 말도 안 되는 종교적인 핑계를 대며 헤어 지자 했었다. 그렇게 우린 헤어졌다. 그런 결정이 있고 부모님은 속상해했고 처음으로 차였던 나는 충격이 컸었다. 


게다가 학교 씨씨였던 공대 오빠는 우리 과 선배의 남자 친구랑 같은 학과 여서 선배의 남자 친구를 통해 소식도 듣게 되고 가끔 마주치기도 했다. 또 공대 오빠를 소개해줬던 언니가 다시 그 사람이랑 나를 만나게 하려고 여러 번 나를 술자리에 불러 냈지만 난 나가지 않았고 죄책감인지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서 인지 졸업 할 때까지 피해만 다녔었다. 


맥주 회사 건물을 보며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양다리, 철없던, 사랑이 뭔지 몰랐고 꿈도 없었던 나의 20대가 생각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회계사랑 그렇게 헤어진 게 잘된 거라 생각이 들었다. 나를 모르고 나를 찾기 전에 누군가를 만나 결혼이란 것을 했으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그때 내가 차인 것이 다행이었다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회계사 그분에게 고맙다. 아마 그 사람을 잘 되었을 거다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고 유능한 인재였기에 지금은 매우 높은 위치에서 일 잘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은 이름조차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들과 함께 했던 장소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학교 씨씨였던 공대 그 사람이나 회계사 그 사람이나 둘 다 잘 지내고 있기를.... 행복하시길...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회계사와 헤어지고 얼마뒤 난 그 사람을 봤다. 난 2층 커피숍에 있었고 그 사람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을 봤었다... 그 사람은 물론 나를 못 봤다. 

그 후에 회계사 남동생이 내 친구와 같은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내 친구와 그 동생이 같은 시기에 졸업을 해서 내 친구 졸업 앨범을 보다 그 회계사 동생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어버이날: 아빠의 빈자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