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이공키로미터 Apr 21. 2024

송크란 축제

#1

일 년 중 가장 더운 날이다. 태양은 희뿌연 구름에 가려있지만 그 열기는 여전히 강렬하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어제와 다르지 않다. 일찍 나와 가게 앞을 청소하고, 분주하게 그날 장사를 준비한다.


어제 손님이 맡기고 간 LP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운이 좋다. 구하기 어려운 바이닐도 제법 있고, 전반적으로 관리가 잘 된 앨범이 많다. 속지가 있는지 확인하고, 먼지나 얼룩이 있는 앨범은 세척을 한다. 앨범아트가 멋진 앨범은 벽면에 정리하고, 그렇지 않은 앨범은 장르별로 잘 구분해서 전시를 한다.


가게가 차이나타운 구석에 있는 탓에 손님들이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좋은 앨범을 좋은 가격에 살 수 있다는 입소문이 나서인지 장사는 그럭저럭 된다. 최근에는 어떻게 알고 오는지 외국인들도 종종 들린다.


띄엄띄엄 손님들이 오기 시작한다. 단골인 나이가 지긋한 레니는 일찌감치 와서 오전 내내 진지한 표정으로 앨범을 꺼내보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그때 외국인으로 보이는 두 명이 들어온다. 들어오면서부터 한 명은 눈빛이 반짝이고, 한 명은 심드렁한 표정이다. 그 한 명은 열심히 앨범 사이를 누빈다. 재즈와 일본음악에 관심이 많은 듯 그쪽에 많이 머무르며 신중하게 앨범을 고른다. 틈틈이 청음도 하면서 조심히 앨범을 다루는 손길을 보니 바이닐을 많이 듣는 친구 같다. 다른 한 친구는 이런저런 앨범을 고르다가 흥미를 잃었는지 밖으로 나가 담배를 꺼내 문다.


가게가 너무 조용한 것 같아 몇 장의 앨범을 들고 가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오늘은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 고민하다가 얼마 전 안타깝게 타개한 류이치 사카모토의 앨범을 올려 넣는다. Sweet revenge 앨범의 Anna란 곡이다. 이내 작은 가게 안은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로 가득 찬다. 모르긴 몰라도 가게 안의 손님들은 모두 슬며시 귀를 쫑긋하고, 이 음악을 듣기 시작할 것이다. 이 곡을 잘 아는 누군가는 추억에 잠겨 음악에 심취하고, 이 음악을 새롭게 알게 된 누군가는 설레는 마음으로 이 음악을 들을 것이다. 아까 반짝이는 표정으로 들어온 그 친구는 이 음악을 잘 아는지 앨범 고르는 걸 멈추고, 음악에 집중한다.


정오가 넘어서자 더위가 한결 강해진다. 슬슬 거리에 물총을 들고 다니는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덩달아 나도 신이 난다. 아이들을 위해 난 밖에 드럼통을 놓고, 호스로 물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일 년 중 오늘 하루는 방콕의 온 시민들이 동심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더위가 한 풀 꺾이기를 바라고, 새로운 한 해에는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빌며,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행운을 기원한다.


관심 가던 그 친구는 허브 앨버트와 Cymbals의 앨범을 골라왔다.  A&M의 명반 중 하나인 허브앨버트의 rise 앨범을 고른 것을 보면 음악에 관심이 많은 친구 같다. Cymbals 앨범은 약간 의외 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들이 궁금해진 나는 계산을 하며 어렵사리 질문을 했다.


“어디에서 오셨나요?”

“아, 네 저희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그렇군요. 태국은 자주 오시나요?”

“네 저는 태국을 좋아해서 자주 오는 편이랍니다. 이 친구는 그렇지 않고요.”

“궁금해서 그런데, 혹시 저희 가게는 어떻게 알고 오셨나요? 최근에 외국분들이 많이 오셔서요”

“네, 구글맵으로 검색해서 왔답니다. 좋은 앨범도 많고, 가격도 저렴하다는 평이 많아서 어렵게

찾아왔답니다. 게다가 근처에 유명한 국숫집도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왔답니다.”

“아하, 바로 길 건너 나나국숫집 말하나 보군요. 그 집 국수 정말 특별하답니다. 꼭 드셔보세요.

 그나저나 오늘 송크란으로 거리가 물총싸움으로 난리가 날 텐데, 바이닐 조심해서 가져가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더위에 쓰러질 지경인데, 물을 맞으면 오히려 시원할 것 같네요.”

“그렇다면, 카오산로드에 한번 가보세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제대로 물세례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하하하.”


바이닐을 소중히 품고, 그들은 떠나갔다. 다시 가게는 조용해진다. 거리는 본격적으로 물싸움이 시작되었다. 물을 뿌리는 쪽이나 맞는 쪽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오랜 세월, 에어컨도 없던 시절, 35도를 넘는 더위를 우리는 이렇게 견뎌왔다.



#2

허브앨버트의 앨범을 이 가격에 사다니 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구할 수 없는 Cymbals의 싱글 앨범이라니 이곳은 꼭 다시 와야겠다. 친구 녀석은 더위를 먹었는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서둘러 근처 식당을 찾아갔다.


나나식당은 특이한 국수를 파는 집이었다. 넓적한 면을 구워 먹는다고 할까. 떡 비슷한 식감의 국수에 살짝 익은 오징어와 튀긴 치킨은 아주 독특한 맛이었다. 다만 양이 좀 적었는데, 그래도 맛있게 먹고, 겨우 기운을 차렸다. 녀석은 맥주를 쭉 들이켜더니 정신이 돌아온 눈치다.


다음 목적지는 카오산 로드. 호텔에서도 레코드점 사장도 오늘은 꼭 이곳을 가보라고 추천을 해 주었다. 다만, 커다란 LP를 들고 가는 것이 좀 부담이 됐다. 마침 가까운 거리여서 툭툭이를 타고 카오산으로 향했다.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도로의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에 지쳐갈 즈음 갑자기 물벼락이 쏟아진다. 바로 옆 툭툭이에서 한 무리의 태국 젊은이들이 우리를 향해 신나게 물총을 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람. 앞을 보니 툭툭이끼리, 혹은 승용차의 창문을 반쯤 열고, 거리에게 한바탕 물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꽉 막힌 도로를 이리저리 돌아 카오산 로드 외곽에 겨우 도착했다.


물총을 파는 사람들, 얼음이 가득 찬 커다란 통에서 맥주와 물을 파는 사람들, 커다란 물총을 어깨에 맨 사람들, 신나는 음악에 맞춰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로 거리는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어리둥절하다가 커다란 물총을 하나씩 샀다. 그리고, 사방으로 물을 뿜어내는 거대한 인파 속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우리는 카오산 로드와 람브뚜리 거리를 오가며 행인들, 상인들과 신나게 물총싸움을 했다. 상인들은 차가운 물을 바가지로 뿌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신나게 물을 뿜었다. 거리 맞은편 누군가와 눈이 라도 마주치면 신나게 물총 세례를 뿜었다. 거리 주변 상점에서는 신나는 음악이 나오고, 난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냥, 신이 나게 물을 뿌리고, 물을 맞았다. 흥겨운 음악과 들뜬 사람들의 열기는 거리를 뜨겁게 데우고, 하늘 높이 치솟은 물줄기는 찬란한 무지개가 되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몇 달간 시달리던 프로젝트에 대한 고민도, 떨어지는 주식에 대한 걱정도, 사춘기 큰 아이와의 갈등도, 몇 달째 괴롭히던 무릎 통증도 모두 사라지고, 난 연희동 골목을 누비며 물총을 쏘던 개구쟁이가 되었다.


#3

나는 허브 앨버트를 출세시켜 준 앨범이다. 허브는 좋은 음악을 많이 만들었지만, 상복이 유난히 없다가, 내 앨범에 있던 Rise란 곡으로 1979년 빌보드 1위를 기록하게 된다. 덕분에 나는 전 세계적으로 신나게 팔려 나갔다. 당시 재즈에 한참 관심이 많던 일본에서 만들어진 나는 교토의 한 재즈 애호가에게 팔려 그 어떤 앨범보다 자주 그의 턴테이블에 올라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태국 주재원으로 발령받게 되고, 나는 졸지에 일본을 떠나 머나먼 태국에 오게 된다.


일본과 달리 습하고, 더운 태국 날씨에 견디기 어려웠지만, 바이닐을 소중히 다루는 일본인 주인 덕분에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인 주인이 다시 일본으로 돌어가게 되고, 나는 어느 중고 LP상점에 헐값에 팔리게 된다. 그리고, 방콕의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다. 재즈바 라이브 공연 중간중간 허브의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소란스럽고, 요상한 냄새로 가득한 소이 카우보이의 펍에서 성심껏 음악을 들려주었다. 시간이 흐르고, 표지가 바래질 즈음 난 다시 차이나타운 근처의 LP상점에 돌아온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LP도 재즈도 듣지 않고, 나는 오랜 시간 상점 구석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양인이 나를 선택했다. 그 옛날, 날 처음으로 선택했던 그 일본인과 묘하게 닮았다. 도수가 높은 안경을 끼고, 키가 크고 말랐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난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따라나선다. 그는 어느 시끄러운 거리로 나를 데려갔다. 사방에서 음악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웬걸. 나에게 치명적인 물이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이봐 조심하라고. 물폭탄을 겨우 피해, 난 한국의 한 가정집 턴테이블에 무사히 자리를 잡게 된다. 포근하고, 아늑한 이 집이 왠지 마음에 든다.








작가의 이전글 일 년 결산, 음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