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 교사의 인권침해(?) 이야기
문명교실vs야생교실
재산과 권리, 이를 유지할 규칙을 갖춘 공동체를 문명이라 부른다. 사람이 둘 이상 모이면 권력이 생긴다고 했다. 셋 이상 모이면 공동체가 시작된다. 교실에는 20명이 넘는 아이들과 교사가 있다. 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인권과 그 인권을 지켜줄 규칙이 필요하다. 지금 대한민국 교실에는 인권과 규칙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 규칙을 지켜줄 규칙이 없을 뿐.
규칙은 인권을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개인의 인권과 자유는 타인의 인권과 자유 앞에서 멈춘다. 문제는 멈추지 않는 개인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점이다. 가위로 색종이를 자르는 대신 옆 사람에게 장난(?)을 하거나 위협을 한다. 리코더로 비행기 노래를 연습하지 않고 검술(?)연습을 하며 옆 사람을 위협한다. 교사는 어떻게 해야 인권을 보호하는 것일까?
스스로 자신의 인권을 지키라 해야 할까?
도망치건 반격하건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의 자율에 맡겨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결국 그 학생을 말리고, 주의를 주고,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여, 모두의 인권을 보호하고, 규칙을 지켜나가며, 공동체를 유지해 나가야 하는 의무는 교사에게 있다.
그럼 지금 대한민국은 교사들이 이러한 의무를 무사히(?) 수행할 수 있을까?
아니다. 안타깝지만 현실이 그렇다. 의무는 분명히 있지만 이를 수행할 권리나 권한은 매우 희미하다.
그리고 그 희미함을 눈치채는 학생이 한 명 두 명 늘어가면 교실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야생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어린 아이들로 가득한 교실에서 한 두 번의 예외는,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 되어 아이들의 머리속에 자리잡는다. 수업 시간에 공을 던지고 놀아도, 리코더를 휘둘러 다른 아이들을 겁먹게 하여도 자신에게 돌아오는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굳이 있다고 하자면 교사의 목소리 정도.
그러면 안 된다. 하지 마라. 그만 해라.
이 말로 학생의 행동을 멈추려면 대한민국 교사들은 내공을 쌓고 오거나 포스를 익히는 방법밖에는 없다. 스포츠로 비유하자면 축구 경기에서 심판의 휘슬이나 레드카드가 나와도 선수들이 그냥 무시하고 경기를 계속하는 꼴이라 할까. 현대 축구에서 소림축구로 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