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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 Vianney Mar 18. 2023

멘토렐라 은총의 성모 성지 II

순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전편에 이어서...


성 베네딕도의 동굴


성 에우스타키오의 소성당이 서있는 거대한 바위 중간에는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한 사람이 간신히 비집고 들어갈 정로 갈라진 바위 사이를 들어가면 빛은 부족하지만 공간은 넉넉한 장소가 천천히 눈 속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곳은 베네딕도 성인의 청동 상이 놓여있는 제대가 있는 성 베네딕도의 동굴입니다. 이 동굴에서 베네딕도 성인은 노르치아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 세상의 삶을 버리고 은수 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하느님을 찾아 35킬로미터 떨어진 수비아코의 거룩한 동굴로 가셨습니다. 비록 이 사실과 관련해서 기록된 문서는 없지만 1661년 이곳에 머물기 시작했던 예수회 신부이자 학자였던 아타나시우스 (Atanasio Kircher, 1602-1680)는 이곳이 베네딕도 성인께서 직접 세우신 12개의 공동체 중에 하나였고 성인 스스로가 동굴에서 2년 동안 머물며 기도 생활을 하셨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이것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사실상 이곳에 수도자들이 처음 머물기 시작한 것은 5세기경부터라고 하고 당연히 그들은 성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이 동굴에서 베네딕도 성인의 첫 번째 전기를 쓰신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께서도 머무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성당 마당에서 바라본 베네딕도의 동굴이 있는 바위.  바위 위에는 에우스타키오 소성당 지붕이 보인다. (C) 2023. Roma Vianney all rights reserved.


베네딕도의 동굴 외부와 내부에서 바라본 입구 (C) 2023. Roma Vianney all rights reserved.



멘토렐라 성지 성당


멘토렐라 성지 성당 정면과 입구 왼편엔 성 요한 바오로 2세 청동 상이 세워져 있다. (C) 2023. Roma Vianney all rights reserved.
성당 내부 (C) 2023. Roma Vianney all rights reserved.
성당 내부와 17세기 제대 위의 은총의 성모 마리아 목각상 (C) 2023. Roma Vianney all rights reserved.

수도원 성당은 사슴뿔 사이에 나타난 십자가와 예수님의 모습을 목격한 성 에우스타키오가 있던 자리에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처음 세웠으며, 그 당시 교황 실베스트로 1세에 의해 축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5세기말에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과 그의 어머니 실비아가 베네딕도의 수도자들에게 멘토렐라의 소유권을 주면서 수도원 건물도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베네딕도 수도자들이 성모님에 대한 공경으로 이곳에 공식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 문서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9세기 경으로 학자들은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12세기가 되면서, 하느님의 어머니에게 봉헌되었던 6세기의 성당을 확장해서 다시 건축하였고, 이때에 처음으로 이 성지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나무로 된 기적의 성모자상이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어떤 공방에서 만들었거나, 아니면 이름 모를 베네딕도회의 한 수도자가 만들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중앙 제대 아래에는 12세기 때 만들어진 코스마데스코 장식의 대리석 바닥이 남아있고, 성당 입구를 들어가자마자 오른편에 있는 성 실베스트로 소성당도 이 시기의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곳은 근처 도시 사람들에게 속죄를 위한 성지순례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부활절과 성모승천 대축일을 기념하여 맨발로 올라오거나 속죄의 의미로 돌을 들고 오는 등, 근처 도시 사람들에게 이곳은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한 순례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도 이곳을 순례하기 위하여 올라왔다고 합니다. 이 말에 신빙성이 있는 것은 수비아코에 세 번이나 순례를 다녀간 것이 사실이며 성모님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공경한 성 프란치스코였기 때문에, 그 당시 유명했던 이 성모 성지를 찾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14세기 말경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베네딕도 수도자들은 이곳을 떠나게 되었고, 교황 대리 수도원장들이 이 성지를 관리하려고 하였지만 사람이 살지 않으면 집이 스스로 무너지는 것처럼 이곳도 점차적으로 부서져가기 시작하였습니다.


17세기 중반 다행히 독일인 예수회 신부이자 학자였던 아타나시우스가 성모 성지로써 이곳의 중요성을 알아보았고, 성지 재건을 위한 개인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근처 교구의 추기경들을 만나 성지의 중요성을 알림과 동시에 재정적으로 지원해 줄 수 있는 독일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성지 재건을 위한 설득을 하였습니다. 덕분에 성당 지붕을 고치고 바닥을 다시 깔았으며 성당 내부 장식과 함께 실베스트로 소성당의 프레스코화도 이때 새롭게 그려지게 됩니다.



성 실베스트로 소성당


소성당 제단과 제단 위의 나무 부조 (C) 2023. Roma Vianney all rights reserved.

성당 입구 오른편에 벽으로 분리된 공간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제대와 함께 프레스코화로 벽과 천장이 그려져 있습니다. 제대 위에는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부조가 있습니다. 12세기 경의 것으로 마에스트로 키에티의 굴리엘모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고, 사슴뿔 사이에 발현한 예수님의 모습과 함께 실베스트로 1세 교황이 성당을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성 에우스타키오 성당을 축성하는 성 실베스트로 1세 교황
성 실베스트로 교황에게 세례를 받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 소성당 또한 같은 교황이 봉헌하였고 소성당과 연결된 벽 위에는 성 에우스타키오 성당의 축성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세례를 표현한 17세기의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많은 순례자들은 다시 옛길을 따라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하였고 1664년 교황 알렉산드로 7세는 9월 29일을 특별히 멘토렐라 성모님의 기념 축일로 선포하게 됩니다. 멘토렐라 성모님에 대한 사랑과 성지 복원에 전 생애를 바친 아타나시우스 신부의 심장은 자신의 유언에 따라 성모상 아래 제단에 묻혀 있습니다. 이것이 모범이 되어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멘토렐라의 은총의 성모 옆에 묻히길 원하는데, 그중 인노첸시오 13세 교황의 심장도 성모상 오른편 기둥에 모셔져 있고, 왼편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기도하셨던 자리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1857년부터 현재까지는 예수 부활 수도회에서 성지를 지키며 수도 생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들은 혼잡한 세상을 잠시나마 피해 찾아오는 순례자들과 방문자들을 맞이하고 있고 은총의 멘토렐라 성모님의 도움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내적 평화와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추기경 시절 걸으셨던 오솔길. 지금은 502번 순례길로 표시하며 '카롤 보이티와'로 이 길을 부르고 있다.  

이 성지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기도하기 위해 자주 찾아오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중에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하였고, 그 후 폴란드 크라쿠프의 추기경 시절 이탈리아에 머물 때마다 멘토렐라 은총의 성모님을 찾아오셨습니다. 또한 요한 23세 교황님의 선종 후 콘클라베가 열리기 전, 이곳에 오셔서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도 이곳을 바로 찾아오시어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이곳을 공식적으로 방문하신 첫 번째 분이 되셨습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성당 앞에는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모습으로 만들어놓은 교황의 청동 상이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산책하던 길은 순례자들의 길 중에 하나가 되었고,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성모님과 함께 성 요한 바오로 2세를 기억하며 걷고 있습니다. 이 멘토렐라 성지를 인근 도시에서 도보로 올라올 수 있는 길은 모두 아홉 개가 있습니다. 순례자의 길 표시인 이정표가 잘 되어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에 맞게 선택하여 걸어 올라가는 것도 성지를 방문하는 의미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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