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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보스J Nov 10. 2024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무대를 설계하는 일

언어가 다르면 생각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생각'한다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통역은  종종 문화적 가교 역할을 하는 것에 비유된다.  마치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처럼, 다른 언어와 문화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서있다.  하나의 대화 안에서 마주하는 각각의 세계를 이해하며 메시지뿐 아니라 문화적 맥락, 뉘앙스, 정서적 공감까지 전달한다.  특히 외교나 정치와 같은 중대한 순간에는 이 다리의 견고함이 세계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  


#We will bury you.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흐루쇼프

냉전이 한창이었던 1956년 소련 흐루쇼프 총리의 발언은 하마터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뻔했다.  모스크바 주재 폴란드 대사관에서 열린 리셉션에서 그는 서방 국가의 대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연설을 했다.  문제가 되는 발언은 "We will bury.(우리는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로 통역된 대목이었다.  미국은 이를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흐루쇼프의 발언은 "We will be present when you are buried." (당신들이 소멸할 때도 우리는 건재할 것이다)"이라는 러시아어의 일반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이었다고 한다. 즉, 특정 국가를 겨냥한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 맥락을 알았다면 덜 위협적인 방식으로 통역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통역사는 '문화적 큐레이터'역할도 담당하게 된다. 예를 들어, 비판적 의견이나 거절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존중의 표시로 여겨지는 문화가 있는가 하면, 명확하고 직설적인 표현이 솔직함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화도 있다.  이 경우 통역사는 마치 정교한 붓으로 그림의 색조를 조절하듯 어조를 조절해야 한다.   한쪽에서 말을 잠시 멈추거나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등의 신호를 상대 파트너가 질문에 대한 회피가 아닌 존중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해야 한다. 이런 미묘한 조정이 없다면, 양측의 신뢰는 금세 균열이 생기고 협상의 분위기는 얼어붙을 수 있다.  통역사는 때로 중재자가 되어,  양측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잘 전달하여 대화를 이끌어가야 한다.  


#생각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생각한다 

Edward Sapir와 Benjamin Whorf는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언어 상대성 이론을 발전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이 가설에 따르면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생각한다.' 언어는 그저 소통을 위한 수단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다. 통역사는 이 렌즈를 바꾸어 끼우는 역할을 맡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어는 집단적 정체성이 강한 언어로 '우리'라는 표현이 자주 쓰인다.  한국인들은 '우리나라, '우리 회사', '우리 가족', 등으로 집단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사람이 우리 아내입니다."를 곧이곧대로 "This is our wife"로 번역하면 아주 이상하게 들린다.)  예전에 비해 개인에 대한 존중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상대적으로는 '집단적' 가치를 중시한다. 그러나 서구권의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이보다 개인적이고 분명한 책임을 강조한다. 이행의 주체와 책임의 소재를 명확히 해야 하기 때문이다. 

Source: Nathalie Nahai 2013

한국 기술 기업과 유럽 고객사 간의 회의를 통역했을 때의 일이다. 한국 팀은 '우리는 ….라고 믿습니다' 또는 '우리의 이해'와 같은 표현으로 팀의 결속력을 강조했다. 반면 유럽 고객은 어떤 부분은 정확하게 누가 책임을 질지 명확하게 하고 싶어 했다. 한국 기업의 집단적 의사소통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유럽 고객사가 볼 때 질문을 회피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과제였다. 이러한 문화적 격차를 해소하려면 언어 능력뿐만 아니라 각 그룹의 가치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잘못된 의사소통이 긴장으로 이어질 수 있는 세상에서 통역사는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넘어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는 신뢰의 조력자 역할까지 해낼 수 있고, 해내야만 한다. 다행인 것은 서구의 기업들도 한국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하려고 부쩍 노력하는 것 같다.   얼마 전 한국 유통 기업과 유럽 소프트웨어 기업 간의 회의였는데 유럽 쪽 책임자는 통역 전에 나에게 먼저 당부를 했다.


"I’d appreciate it if you could convey what I say in the most respectful tone possible."

“제가 하는 말을 최대한 존중하는 톤으로 전달부탁합니다.”  


통역사는 언어에 내재된 가치와 세계관을 함께 전달하며 사람들이 서로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서로를 비즈니스 상대방이 아닌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지닌 개인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비즈니스 맥락에서 ‘파트너십’이 많이 언급되는데 우리는 본질적으로 집단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의 인관관계에서 먼저 '파트너'가 된다.  인간관계에서 파트너가 되어야 집단적 파트너십 논의도 가능한 셈이다. 



통역은 단순한 언어의 다리라기보다는 두 세계를 이어주는 일이다.  서로 다른 세계가 만나는 지점에서 통역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대를 설계한다. 겉으로는 평범한 대화 같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문화적 맥락과 뉘앙스가 숨 쉬고 있다.  통역사는 서로가 상대방의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다.  통역된 언어 사이사이에서 정서와 공감의 실을 엮어, 대화의 깊이를 더해준다.  때로는 오해로 가득한 순간을 가로지르며 갈등을 해소하고, 때로는 한쪽의 깊은 진심이 다른 쪽에 닿을 수 있게 도와준다.   


커버 사진: UnsplashMaria Tene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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