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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보스J Dec 11. 2023

아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교정이 아니라 교감이다.

(독서일기) <깨어있는 양육> 을 읽고(2)


"엄마? 저 게임해도 돼요?" 

"음, 영어 숙제 다 하면 30분 하게 해 줄게."


주말이면 늘 아이와 반복하는 대화패턴이다. 순순히 숙제를 부랴부랴 마치고는 아이는 게임에 몰두한다.  나를 포함한 많은 부모가 이런 식으로 아이들과 끊임없이 무언가를 거래한다. 


<깨어있는 양육 Out of Control> 저자 세팔리 차바리 Shefali Tsabary 박사는 이를 '죄수와 간수 양육법' (The Prisoner-Warden approach to parenting)이라고 부른다. 


"간수는 아이의 행동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죄수에 해당하는 아이는 옳거나 그른 행동을 하고, 간수 역할을 하는 부모는 보상이나 처벌을 내리기 바쁘다.  이내 죄수는 간수의 통제에 의존해 행동을 조절하게 된다. 


이런 보상과 처벌의 양육 방식은 아이에게서 스스로 절제하는 법을 배울 능력을 빼앗는다.  아이 안에 잠재된 자기 조절 능력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이는 모든 행동을 간수하게 의존하는 꼭두각시가 되고 내적 동기가 아닌 외적 동기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서로 조종하고 조종당하는 악순환이 반복돼, 서로를 괴롭히느라 누가 간수이고 누가 죄수인지조차 구분이 안 되는 지경에 이른다. "


아이가 '그른'  행동을 하면 부모는 '내 뜻을 거스르는' 반항이 섞인 거역으로 받아들이고 훈육으로 고치려고 하다.  


"아이에게 차분히 그 이유를 물어보면, 대개는 그런 의도가 전혀 없고, 아이 나름대로 고심한 결과임을 알 게 된다.  아이나 어른이나 똑같이 정당한 욕구를 가졌는데, 왜 아이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표현하면 안 될까? 


(중략) 


우리는 아이들의 건강과 안전, 미래를 염려한다.  그러다 보면 아이들을 우리의 '안전한 통제' 아래서 훈육한다. 우리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의 상당 부분을 떠받치는 건 두려움이며, 그것이 우리가 아이들을 훈육하는 진짜 이유일 때가 많다.  물론 부모로서 우리는 "난 아이들을 무척 사랑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두려움을 정당화한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곧 그 사람을 걱정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아이들을 걱정하는 이유는 오히려 우리의 자신의 안전과 행복이 우려스럽기 때문이다.  상대가 우리의 머릿속 영화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면 성취감이나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어렸을 때 자신의 진정한 자아가 망가진 데데한 공허함에서 비롯된 결핍감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아이를 이용해 우리의 결핍감을 채우려는 욕구와 아이에 대한 사랑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부모와 아이의 관계는 진흙탕이 되고 만다. 


훈육은 자신의 부족함을 맞닥뜨렸을 때 무력감을 느끼는 부모가 기대는 버팀목에 지나지 않는다.   


훈육은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과 관련이 있으므로 부모로서 해야 할 주요 임무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비추는 무력감을 자신 안에서 다스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양육의 초점이 아이가 아니라 부모가 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부모가 된다는 건 우리가 자라는 동안 마비되다시피 한 우리 자신을 되살리는 놀라운 기회라는 뜻이다. 양육의 목표는 우리 내면의 충만함으로 아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


훈육 대신 교감 


"부모는 아이를 끊임없이 교정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아이와 교감을 나눠야 한다. 


아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건 교정이 아니라 교감이다.

What children truly crave is connection, not correction.  


아이들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 그대로 사랑받고 싶어 할 뿐 더 바라는 게 없다. 


우리는 아이에게 말을 건넴으로써 교감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듣지 않고 우리의 바람만 강요하니 교감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말하는 대신 아이의 기분에 조용히 맞추는 것이다.  


온갖 양육법이 개발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가만히 곁에 있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훈육을 둘러싸고 남편과 의견을 달리했던 내가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뉴욕에 있는 저자와 한국 독자들 간의 북토크 통역을 요청받고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 두 권 <깨어있는 부모>, <깨어있는 양육>을 맹렬하게 읽어 내려갔다.   


(안전과 건강 문제를 제외하고는) 아이는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를 통과해서 나왔을 뿐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이 멋진 세상을 함께 향유할 존재라고 믿어왔던 내 방식이 '관대' 하기만 한 양육법은 아님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 역시 불완전한 부모로서 조급했다.  '가만히 곁에 있어주지 못하고' 개입하기 일쑤였다.  아이가  직접 부딪혀보고 스스로 터득할 기회를 박탈했다.  아이의 실패를 두려워하기보다, 실패한 아이를 둔 부모가 되고 싶지 않은 내 욕구의 발현이었다.   '피아노 잘 치고, 운동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은 것도 내 바람이었다. 


한창 게임에 몰두해 있던 아이에게 다가갔다. 


"게임이 그렇게 재밌어? 무슨 게임인데?" 

창피하게도 나는 이제껏 아이가 하는 게임이름만 알뿐 어떤 게임인지 잘 몰랐다. 


"재밌어요. 집도 짓고 거래도 하고" 

아이패드에 눈을 고정한 채 조그마한 입만 움직인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엄마는 게임 하나도 재미없던데." 

아차, 괜한 말을 했다 싶었는데.. 아이가 대답한다. 


"엄마랑 나는 다르니까요.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지." 


표지 사진: Unsplash의 Marcos Paulo Prado

#깨어있는양육#양육#훈육#깨어있는부모#교감#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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