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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썰 99] 壽, 노인과 밭

밭이 사라지다.

by 우공지마

壽(목숨 수) : 士(선비 사) + 乛(구결자 야) + 工(장인 공) + 一(한 일) + 吋(마디 촌)


서주 금문 壽 자는 노인과 밭입니다. 지금과는 비교가 한 되게 간단했습니다. 허리가 굽은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해서 밭을 내려다보고 있지요. 이랑과 고랑을 구불구불한 선으로 그려서 밭 모양이 꽤나 실감이 납니다. 세월이 흘러 '口'나 '手(=寸)'가 아랫부분에 추가됩니다. 이를 두고, 일꾼들을 향해 손가락질과 함께 깨알 잔소리를 하는 노인의 모습이라 하기도 합니다. 좀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吋에 '질책하다'의 뜻이 있으니 그럴 듯도 합니다.( 【 그림 】1~6, A, B )


壽 자의 원래 뜻은 '목숨'이 아니라 그냥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냥 '노인'을 그려서 노인을 가리켜도 될 텐데, 왜 굳이 밭을 함께 그려 넣었을까요? 그리고, 세월이 흘러 '口'나 '手(=寸)'가 따라붙은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 그림 】壽의 자형변천

이런 해설이 있습니다. 吋(마디 촌)을 술잔(口)을 받들어(手) 노인에게 드리며 장수를 기원하는 헌수(獻壽) 장면이라 것인데요. 장수, 보전, 축수처럼 壽에 긍정적인 의미가 많이 담긴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타당한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어의가 강한 '질책' 또는 '잔소리'와는 사뭇 결이 다릅니다. 노인을 잔소리꾼이라 놀리면서 동시에 공경까지 하기는 어렵잖아요.


이제 앞에 질문에 답이 가능해졌습니다. 답은 '변화 없는 세상'입니다. 고대 농경사회도 발전은 했겠지만 그 속도는 너무 느렸습니다. 수백 년 동안 수 많은 세대가 바뀌었지만, 농경의 기술 기반은 그저 대물림일 뿐이었습니다. 국한된 작물, 저급한 농기구, 자연에 의존한 농법, 하층 농민들의 문맹! 그러다보니 기댈 것은 경험과 기억이 전부였습니다.


그 경험과 기억,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존재는 바로 노인이었던 거죠. 즉, 먹고사는 문제가 노인들의 '잔소리'와 '손가락질'에 달려 있었다는 겁니다. 노인은 생존을 위한 지혜의 정보 저장소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Google이나 Naver였던 셈이지요. 그러니, 공경할 밖에요. 노인 공경은, 고대사회를 지탱하는 생사의 문제였던 겁니다. 효(孝)와 경로(敬老)가 고대사회의 고리타분한 도덕률이 아니였던 겁니다.


그래서, 노인 옆에 굳이 밭이 놓인 겁니다. 농경시대 생산의 원천인 밭을 가장 잘 아는 지혜로운 자, 그가 곧 노인이었던 겁니다. 그 노인의 지혜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어때야 했을까요? 당연히 그 노인을 잘 모셔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노인은 오래오래 살아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밭은 생산과 수확, 반복과 세월 그리고 풍요와 평화의 상징입니다. 壽 자가 노인과 밭을 대비시킨 것은 그 둘이 상통하는 점들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씨앗이 심기고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고, 거두어 사라지는 밭의 이치와 지혜, 옛사람들은 노인의 일생에서도 똑같은 것들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술잔(口)을 받들어(手) 헌수(獻壽)를 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哈哈。


사족, 寿가 壽의 간체자입니다. 복잡한 획들을 휘리릭 한 번에 흘려 쓴 초서를 소환한 것인데요. 그런데, 중요한 의미소인 밭이 어디로 갔는지 흔적도 없어졌습니다. 인류의 근현대가 이미 노인의 가치를 밭에서 찾을 이유가 없어진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는 듯합니다.( 【 그림 】C )


오늘날 기술발전은 인류가 경험한 수만 년의 시간을 엄청난 속도로 압도하고 있습니다. 한 때 인류의 기술주기가 세대주기보다 길었던 적이 있습니다. 인류가 경험한 대부분의 시간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작 한 세대 만에도 기술주기가 몇 차례씩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쫓아가기가 버거울 정도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노인'과 '밭'의 의의는 퇴색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니, 언감 밭이라니요! 그리고 노인을 존경하라니요!


다만, 가만히 보고 있자니 寿 자의 상단에 선 세 개는 우리 어머니 이마에 깊게 파인 몇 개의 주름이고, 왼쪽 아래로 내려 삐친 기다란 선 하나는, 자식들과 세월의 무게에 눌려 휘어진 당신의 등을 닮았습니다. 노인의 세상은 스러진 지 오래고, 그 뒤에 남은 이 애잔함이란...! ㅠㅠ


“寸은 그분을 향한 내 손이라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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