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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세긴 흉터
Jan 23. 2024
눈이 와도 걸었다. 비가 와도 걸었고 잠들 밤에도 걸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걷던 낮이 있었고, 사람을 피해 걷던 새벽이 있었다. 벤치에 앉아 땅만 쳐다보며 더는 움직이지 못하던 시간을 기억하고 사람 없는 곳을 찾아 흘러가는 물을 하염없이 보던 한나절을 기억한다. 그럴 땐 염원처럼 노래를 들었다. 움직이지 않는 발을 재촉하기 위해, 걷고 걸어서 멀어지기 위해 수 번을 듣고 수 번을 되새겼다. 나는 나아졌을까?
오늘 할 일에 산책을 적어도 나가지 못하는 횟수가 제법 된다. 산책을 한 날은 그 자체로도 뿌듯함을 느낄 만큼 특별한 일이 되었다. 비가 크게 내리거나 눈송이가 굵게 흩날리면 ‘내가 이런 날에도 기어코 걸었구나.’ 그 기억이 생소하게 느껴 질만큼 집착과 같았던 걷기였다.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내가 걸은 것은 사람이 만든 산책로가 아니었다. 지난 삶이었다. 생의 단단한 밑바닥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흘렸던 눈물이 가는 바람에도 휘날리던 흙모래를 잠재우고 무거웠던 발걸음이 여기저기 패인 곳을 고르게 만들던 시간이었다.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소중한 너를 잃는 게
나는 두려웠지
하지만 이젠 알아
혼자 비바람 속을 걸어갈 수 있어야 했던걸
삶은 여행이니까
언젠가 끝나니까
강해지지 않으면 더 걸을 수 없으니
듣고 또 듣고 들어야 울더라도 한 걸음 앞으로 나갈 수 있던 시간... 뺨에 부딪히던 비와 눈을 다시 기억한다. 축축했던 발끝과 시리던 코끝을 마지막으로 떠올린다. 멍하니 쳐다보던 물과 고개를 들 수 없어 노려보던 땅을 놓아준다. '혼자 비바람 속을 걸었다.' 지난 몇 년을 가장 완벽히 표현하는 아름다운 문장 앞에서 다시 여행을 준비한다. 나는 나아졌을까? 다시 걸어야 알 수 있을 대답이다. 하루가 굴러가고 삶은 여행이 된다.
<삶은 여행> 이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