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낯선 아이가 있다. 아이의 나이는 3살쯤 되어 보인다. 장화를 신고 파아란 나시를 입은 남자아이는 두 손을 모아 옥수수를 쥐고 있다. 옥수수밭에 있는 이 아이가 누구였더라? 아이디를 타고 프로필창에 도달했다. 아뿔싸. 구였구나. 구의 아이였구나. 나의 첫사랑이자 짝사랑이었던 구의 아이구나.
나의 첫사랑 이야기는 미미하고도 절절하다. 어떠한 클라이맥스도 없이 장기기억보관소에서 흥행하고 있다. 나는 구를 만나기 전에 두 번의 연애를 했었다. 신입 고교생의 노란 머리띠를 보고 반한 송과의 일주일치 연애가 한번, 공개고백 흑역사를 생성한 엄과의 100일이 두 번째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나의 붐붐 휴대폰을 울린 것은 구였다. 구는 합천군 공립학원에서 만난 동갑내기 남고생이다.
나의 기억 속 구는 머리가 컸다. 하늘로 직진하는 머리카락이 6등신 비율에 큰 몫을 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구는 내가 좋았었는지 심심했었는지 아니면 문자 알이 남아돌았는지 나에게 수시로 문자를 보내었다. 문자내용은 시시콜콜했고, 가끔 뭐 하냐는 질문에 '네 생각'이라는 플러팅 멘트로 나를 공격했다. 구의 문자를 받고 올라가는 나의 입꼬리는 승자의 미소였다. 수업시간엔 선생님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책상 아래에 숨겨진 나의 손가락은 문자 알을 소진하느라 분주했다.
우리는 학원에서 만나면 말 한마디 못하면서 문자세상에서는 장기연애처럼 썸을 탔다. 수줍고도 미약한 그 세상은 기약 없이 길었다. 그러나 길었던 사이버 썸도 수능이라는 절벽 앞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별안간 구의 문자가 뚝 끊겼다. 시작도 하지 않은 우리의 사이는 잠수이별이 아니라 잠수로 종말을 맞이하는 듯했다. 마주치면 아무 말도 못 하고 지나가는 나날이 수능 치는 날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나에게 구의 모습은 슬로비디오로 보였다. 미미한 인연이 연을 다할 때쯤 구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일방적인 잠수로 속을 끓었던 나는 내심 기뻤다. 수능이 끝났으니 우리 사이는 시작이라 믿었다.
마지막 겨울방학에 우리는 만났다. 밥도 영화도 카페도 없는 마지막 데이트를 했다. 왜 추운 날 산책을 했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구의 입술에 후시딘 연고를 발라주던 내 손이 떨렸다는 것만 기억난다. 그날 이후 구의 문자는 끝났고 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이버 썸이 왜 첫사랑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혼잣말로 머물렀던 나의 서투른 감정들을 사랑한 걸지도. 그 시절 감정은 기억의 저편으로 보내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