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친구'보다 '동기'라는 호칭에 점점 익숙해져 가던 때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 K가 전화를 걸어 왔다.
"오늘 A한테 갈 거야?"
A와는 고등학교 때 같은 반에서 꽤 친하게 지냈었고, 대학교 새내기 때도 종종 어울려 놀았지만 바쁘게 살다 보니 근 몇 년간 뜸했었다. 뜬금없는 생일 초대인가? 아니면 혹시 벌써 결혼을 하나?
"A가 오늘 하늘로 떠났어."
처음에는 지독한 장난인 줄 알았다. 세상없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친구는 아니었고,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일도 없었다. 나와 같은 대학을 다니다가 스스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반수'를 택했고, 그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기어이 성공했던 친구였다.
황망한 심정을 겨우 추스르고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는 길에 K에게서 들은 사연은 이랬다.
"A랑 대만으로 여행을 갔는데,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그 자리에서 쓰러졌어. 병원에서 CT촬영을 해 보니 뇌종양이 있었대. 항암치료 받고 크기가 많이 줄었다길래 완치된 줄 알았는데..."
완치된 줄 알고 그 다음 학기에 무리해서 복학을 했단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A는 반 년 후에 죽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더라도 복학을 했을 거다. 그렇게나 우직하고 곧게 달려가던 친구였다. 그 해 봄학기의 캠퍼스에는 겨울 동안 시들었던 모든 것들이 신록으로 다시 피었다. 지나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다시 찾아올 계절이었겠지만, A는 벚꽃이 피고 지는 관악산의 풍경을 다시 보지 못했다.
차창 밖을 바라보며 A에 관한 가장 최근의 기억을 꺼내 보았다. A는 매주 해야 할 일을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에 빠짐없이 적어놓곤 했다. 그는 삶의 어느 순간까지 계획해 두었을까? 중요한 것은, A가 그 누구보다도 매주, 매일, 매 순간을 소중히 여겨왔다는 사실이었다. 그 역시 스스로 정한 목표가 있었을 테고, 그 목표를 향해 누구보다 부지런히 달려왔을 것이다. 이 모든 사실들이 나에게는 슬픔으로, 한편으로는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젊은이의 요절(夭折)이 유달리 슬픈 까닭은 간절히 바라던 무언가가 '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소하고도 즐거운 일들을 '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깨달음.
버스는 두 시간을 달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빈소 앞에서 셔츠 매무새를 가다듬고 심호흡을 했다. 검은 테두리 안에서 웃고 있는 A의 얼굴과, 그 주변을 장식하고 있던 수백 송이의 하얀 국화꽃, 먼저 조문을 와 있던 동창들의 검은 물결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위로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던 가족들의 표정이나, 착잡한 목소리로 나를 반겨주었던 동창들의 표정은 마치 누가 일일이 지워낸 것처럼 전혀 떠오르지가 않는다. 혼자만의 슬픔은 감당할 수 있어도, 수십 명이 한꺼번에 토해내는 슬픔은 깜깜한 방 안에서 수십 개의 전구를 한꺼번에 켠 듯해서 차마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볼 수 없었다.
조문을 마치고 동창들과 큰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10년 전의 남색 재킷과 흙색 면바지 교복이 아닌, 검은 양복을 차려입은 채였다. A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들을 하나하나 꺼내 되새기며 술병을 비웠다. 이내 대화의 주제는 서로의 안부와, 진로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미래로 옮겨갔다. 서른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삶이란 매일 먹고, 일하고, 잠드는 행동들의 총합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저 산 너머의 목표 지점 그 자체였다. 문지방 너머 빈소에는 영원히 스물여섯 살인 A가 시들지 않는 국화꽃에 둘러싸여 미소짓고 있었고, 반대편에서는 우리가 얼굴이 벌게진 채 삶의 여러 장애물과 각자의 나아갈 길에 대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추모해야 할 죽음의 맞은편에는 살아야 할 삶이 있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격류(激流)에 휩쓸려 내려오면서, 우리들은 각자 나눠 가졌던 A와 그의 죽음에 관한 기억을 품에서 차츰 놓쳐 가고 있다. 내가 놓쳐버린 기억을 다행히 B, C, D가 아직 갖고 있을 때도 종종 있으나, 우리 모두가 놓쳐 버린 것들은 아예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리는 셈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가장 먼저 기억을 놓쳐버린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A의 기일을 맞아, 고등학교 동창들이 A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모아 책자를 만들기로 했다. 나는 메시지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는 어떤 말을 써야 할지 망설였고, 바쁜 일상에 치이다 결국 아무것도 내지 못했다. 며칠 후 등기우편으로 발송된 그 책자를, 나는 차마 펴볼 수 없었다.
아, 나는 이런 인간이었던 거다. 용서를 구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떳떳하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A가 우리에게 바라는 건 아마 자신을 기억해주는 것, 딱 하나일 텐데.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A의 사진과, A의 생일마다 어머니가 남기는 절절한 댓글을 볼 때마다, 얼굴이 참을 수 없이 화끈거림을 느낀다. 살아야 할 삶이 있다는 편리한 변명을 앞세워, 기억조차 놓아 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서.
사는 동안 참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두 번째, 세 번째, 열 번째로 경험하더라도 그 슬픔의 무게는 지금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을 터이다. 친구를 너무나도 허무하고 미숙하게 떠나보낸 2018년의 기억은, 아직도 마음 한편에 자리잡은 채 때때로 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냉소와 무관심을 날카롭게 찌르고 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잊지 말라고 다그치면서.